속아서 레아를 아내로 맞이하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 16. 22:34 Writer : 김홍덕

야곱은 두 명의 아내를 얻었다. 레아와 라헬이고, 그들은 그의 외삼촌의 딸들이다. 그런데 야곱이 동생인 라헬을 사모해서 외삼촌 라반과 약속하고 7년을 봉사한 이후에 신혼 첫날밤을 맞이했는데 외삼촌은 약속한 라헬이 아니라 그 언니 레아를 잠자리에 보내었고, 야곱이 일어나 보니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다.


사실 이건 상식적으로 그렇게 이해가 되는 부분은 아니다. 관습적으로 신부가 얼굴을 가렸다고 해도 7년 이란 세월을 보면서 살았다면 목소리라도 구분했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관점으로 보는 것은 아님을 이 블로그를 통해서 누누이 이야기 해 왔다. 성경은 어떤 사실의 진실성을 증명 받으려고 우리 앞에 주어진 책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아 그럼 우리도 아내를 두 명, 아니 네 명을 얻어야 하는 것이구나!’ 이렇게 보는 것은 더 웃긴 것이다. 성경을 객관적인 사실의 진실성을 증명하여 믿음을 확신하는 것이나, 문자 그대로 보는 것이나 둘 다 책으로 치면 행간을 읽지 못하는 것이고, 성경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에서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아와 라헬에 대하여 말하기를 ‘레아는 안력이 약하고, 라헬은 아리땁다.’고 했다. 안력이 약하다는 것은 안목이 약하다는 말이다. 안목이 밝지 못하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용을 육신의 눈이 약하다는 육신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야곱이 아들들을 얻어서 나라의 기초가 되기 위하여 얻은 처음 안내는 안목이 어두운 여자(형식)이었다는 것이다.


야곱은 개인의 신앙이 나라의 신앙으로 전환을 맞이하는 시점의 여정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사람이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아는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여정이라면, 그런 안목과 빛이 비췬 세계가 열린 이들이 만나고, 또한 그 만남의 세계 안으로 자신의 삶을 가져가는 여정이 바로 야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즉 교회의 시대가 야곱으로부터 열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아내를 얻었다는 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공동체의 시대를 맞이하는 여정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모양(아내, 곧 라헬)을 얻는다고 했지만 속아서 자신이 원하는 않는 안목이 어두운 삶의 모양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는 여정을 거쳐서 교회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자, 아내는 남자가 가진 혈통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의를 아들로 표현하는 존재다. 그래서 성경에서 여자는 늘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인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삶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앞에서 신부라고 하는 것이다. 그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아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아들들이 모여서 교회인 것이다. 즉 아들과 같이 자신에게 주신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내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래서 아내, 여자는 사람의 삶의 형식인 것이다.


교회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건물을 지어 놓고, 세상의 법칙대로 서로 경쟁하면서 시험을 쳐서 설교 먼허를 받은 사람을 이력서 보고 뽑으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을 갖추는 것이지, 생명이 그 생명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아닌가? 하나님의 생명이 표현되는 곳이라는 것이다.


신앙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야곱이 원치 않았던 레아를 얻는 것과 같이, 자기가 원하지 않는 형식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을 벗어 던지고서는 되지 않는 것이 생명 공동체라는 것을 야곱이 레아를 속아서 얻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생명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의 정체성은 존재의 시작에서부터 그 가진 모든 성품과 모양까지 자신의 원하는 것으로 된 것이 아닌데, 그렇게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이력서를 보고 직원을 채용하듯이 목사를 뽑고, 자기 목회의 철학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다 내 보내고 자기 철학에 맞는 사람만 교회의 구성원으로 취하며 자기가 원하는 것만 취하여 공동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라도 참 교회의 삶을 누리려 한다면 야곱이 자기가 원치 않았던 레아가 자신의 아내, 곧 자기의 의를 표현해 낼 형식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벗어버리지 않고, 수용하고 오히려 다시 자신이 원하는 아내를 얻기 위하여 또 7년을 수고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과 같은 여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공동체를 누릴 수 없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비약이 심한 말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비약으로 보이는 것은 마치 운동하러 다니지 않는 사람이 새벽 운동이 좋은지 저녁 운동이 좋은지를 판단하고 논쟁하는 것과 같다. 적어도 이 말씀이 과연 원치 않는 삶의 형식을 수용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의 여정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그 사람 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여정을 거쳐내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여정은 단순한 여정이 아니다. 그런 여정을 거친다는 것은 천지창조가 그 사람의 세계 안에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빛이 비취어서 하나님이 존재의 하나님으로 인식되는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된 적이 있는 사람, 그 뿌리에서 시작된 생명이 있는 사람이어야 아브라함과 이삭의 여정을 거친 사람이고, 그런 여정이 자기 안에 간증과 같이 있는 사람은 야곱이 레아를 얻는 것이 교회 공동체가 되려면 자기가 원치 않는 삶의 형식을 순종하는 여정을 거쳐 간다는 것을 본능처럼 알게 된다. 그 생명이 그 여정을 거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에서 남자로 나면 군대에 가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레아가 안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안목이 부족한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신앙적인 안목, 곧 하나님에 대한 안목이 부족하다는 의미이다. 그런 아내를 맞이해서 아들을 얻고 그 아들들이 모여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잘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는다고 사람이 죽기 위하여 태어난다고 하지 않듯, 하나님을 보는 안목이 부족하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치가 없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그렇게 안목이 부족한 형식도 모여야 교회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노아의 방주에 부족한 짐승이 탔다는 것이나, 고넬료를 받아들이라고 베드로에게 보이신 환상과 같은 의미를 가진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야곱은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시작이다. 즉 야곱의 여정은 교회가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고, 한 사람이 교회를 누리기 위하여 어떤 여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교회는 야곱이 원치 않은 레아를 아내 곧 삶의 형식으로 수용함과 같이 자기의 의와 다른 이를 수용해야 교회가 되고, 자기 기준으로 볼 대 부정하게 여길 만한 것이 있는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교회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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