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이라고 하면 얍삽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야곱은 세상적인 안목으로 볼 때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혀 보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할 것은 야곱의 본성이 어떠하든 그런 본성을 야곱이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비단 야곱 뿐 아니라 모든 인생의 본성이 그렇다. 그 누구도 자신의 생김새나 본성을 선택한 사람은 없다.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야곱은 자신이 ‘무엇을 의로운 것으로 여길 것인가?’에 있어 하나님의 의, 자신의 조부로부터 자신에게까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의와 의미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는 그의 그런 의지와 생각을 표현하려고 하니 자신이 가진 본성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야곱을 볼 때 중요한 것은 야곱이 보여준 모습이 아니라, “왜 그랬는가?”하는 것 그것이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쫓겨나듯 도망가고, 그 길에 광야에서 돌베개 베고 자고, 또 아내를 얻으려다 외삼촌에게 속임을 당하고, 그렇게 14년을 고생하는 그런 삶을 왜 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야곱이 그 조부 아브라함과 아비 이삭의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명분이 되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생각했고, 그 하나님의 의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자기 본성, 곧 일반적으로 얍삽하게 느껴지는 그 본성으로 그것이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고자한 야곱의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가는 것도 야곱이 잘못해서라는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목적으로 삼은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삶이 야곱은 야곱스럽게 나타난 것이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야곱의 일을 보고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고자 하는 사람의 삶은 또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본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야곱이든 누구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 모든 일과 심지어 사물까지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을 보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 그것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정체성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 야곱의 이야기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야곱의 이야기를 읽고 듣는 사람 역시 야곱의 여정을 갈 것이고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야곱의 여정을 야곱이 육신의 일에 대한 잘못으로 도망을 가는 것으로 보는 사람은 성경이 육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 손으로 만져지는 이 세상이 본질이라는 안목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야곱의 일은 오늘 나의 이야기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는 것이나 라반의 집에서 고생하는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지, 사람이 잘못하면 고생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안목 없이 성경을 보는 것은 예수님이 받으신 세 번째 시험을 이기지 못한 사람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야곱은 앞으로도 많은 일들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마지막은 애굽이라는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나왔다. 마치 예수님께서 애굽과 같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데,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 땅위의 하나님의 나라인 하나님의 교회가 나온 것과 같다. 아니 그것은 같은 이야기다.


그러면 야곱이 지금 라반의 집으로 가는 것은 예수님의 삶과는 어떤 연관이 있느냐? 예수님의 어떤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고,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지금 야곱의 여정은 어떻게 보면 돌아가는 여정이다. 왔던 곳으로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신앙 안에서 보면 신앙이 떠나온 자리로 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예수님께서 결국은 모든 사람의 신앙이 이르려야 하는 하늘에서 신앙의 출발점이고 여정인 이 땅으로 오신 것과 비슷하다. 왜 그렇고 있는가? 그것은 야곱이 하나님의 의를 사모했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여기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의 좌표가 앞으로만 가는 것이 능사라고 생각한다. 더 좋은 신앙, 더 놀랍고 신비한 능력을 가지는 것과 같은 것을 신앙의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이 있다. <“왜 좋은 신앙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신앙이 점점 좋아진다는 그 현상이 하나님께서 한 개인의 신앙에서 바라시는 최종적인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안식하실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백번 물려서 그것이 사실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치자, 그럼 얼마나 자라고,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나로 인하여는 더 이상 일하시지 않고 안식하시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 기준이나 등급이나 좌표가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이다. 그 답은 누구도 모른다. 항상 옥상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쯤 되면 그런 가지관이 바로 피라미드의 가치관이고,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것을 눈치 채야 한다. 즉 신앙이 세상의 법과 결탁한 것이 그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안 되면 안타깝지만 신앙이 어려워진다. 바로 그렇게 성경을 보고 신앙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외식하는 것이다. 심청전을 읽고 바다에 빠져야 효도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형식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좀 전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이 좋아지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 신앙으로 사람을 얻는 것에 있다. 그러니까 좋은 신앙은 신앙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신앙을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야곱이 아내를 얻기 위해 수고하여 아들을 얻고 나라가 되는 것과 같이 사람을 얻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 공동체가 이루고 그 일원이 되고, 또 그 공동체의 모습이 또 사람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많은 교회들이 착각을 하고, 나름 신앙에 대하여 자신감(?) 아니 계시가 열렸다고 스스로 여기며, 다른 사람의 신앙적 견해에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의를 제기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허점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 좋은 안목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 이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을 것이 아니면 내어 놓지도 말아야 할 것이 어쩌면 신앙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또 어떻게 얻는가? 서울역에서 전도하는 사람을 보고서 교회에 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없지는 않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모습을 보고 교회를 멀리하고, 다니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보다는 적을 것이다. 그것은 삼척동자도 공감하는 일이다. 왜 그럴까? 도둑질 하라는 것도 아니고, 예수 믿어서 천국에 가라는데, 그 간절함이 왜 사람을 얻지 못하느냐 그것이다.


그것은 바로 야곱과 같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야곱이 이 죽을 생고생을 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모했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형을 분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야곱은 하나님의 의에 있어 외삼촌 라반보다, 형 에서보다, 또 자신이 얻은 아내들 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고,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선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그 의를 자랑한 것이 아니라, 그 의로 인하여 종 같은 삶을 살았다. 


왜? 아내를 얻기 위해서, 아들을 얻기 위해서. 그러니까 자신을 보고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사람을 얻기 위하여 자신이 가진 하나님의 의를 섬기는 것에 쓴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야곱의 의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 생명의 본성이 그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피할 수 있다면 잔을 물려달라고 기도하셨지만 그것이 자기 생명의 본성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야곱도 그렇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고 생명이다.


그런데 서울역에서 전도한다고 시끄럽게 하는 사람은 자기 편한 방식으로 한다. 물론 그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한 가지 분명하나 것은 사람을 섬기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섬기려면 섬기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 그렇게 했을 뿐인데 그 사람이 자신을 섬기는 이의 삶을 보고, 오히려 자기를 섬기는 이와 같이 살고 싶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이 땅에 오심을 섬기러 오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신앙으로 군림하는 것이다. 신앙으로 계급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의 신앙 없음을 심판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교회와 이단들의 모습인 것이다. 장로는 남을 섬기는 것을 늙도록 한 사람이 장로지 돈이라는 사회적 역량이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고서 강단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도적질이고, 강도다. 신앙의 계시가 밝다고 신앙 없는 이들에게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느냐?’. ‘그래서 교회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잘~~하는 도다!”라고 책망 받을 일이 바로 그것이다. 신앙이 없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이건 생명이 다른 것이다.


야곱의 모습은 그것과 반대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더 장성하고 더 밝아지면 더 섬기는 것이 그것이다. 목사라고 대우 받고 밥상을 따로 받고 있는가? 그럼 당신은 이미 글렀다. 교회에서 다른 사람의 신앙 없음을 지적질 하고 있는가? 이미 당신은 세상의 것을 신앙에 접목한 사마리아인일 뿐이다. 


진정한 신앙, 장성한 신앙은 야곱이 아내를 얻기 위하여 수고한 것 같이, 예수님께서 그 모든 기적을 행하는 능력도 하늘의 영광도 버리고 사람을 얻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수고하는 삶을 살아서, 그 모습을 보는 이가 스스로 자신의 신앙 없음을 고백하고, 또 가서 그것을 보여준 사람과 같이, 예수님과 같이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살게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야곱이 지금 그 하나님의 나라의 조상이 되는 여정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야곱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는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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