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가의 아름다움을 탐한 아비멜렉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2. 24. 15:26 Writer : 김홍덕

이삭의 아비인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 한 전력이 있는데, 이것도 유전인지 그 아들 이삭도 아비 아브라함과 똑같이 아내인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여서 아비멜렉이라는 왕이 취할 뻔 했는데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경고하심으로 위기(?)에서 벗어나는 일이 있게 된다.


아브라함의 때와 다르다면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을 때는 사라에게 아들이 없었지만, 리브가는 이미 쌍둥이 아들인 에서와 야곱이 있는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아비멜렉왕은 아브라함 때와 같은 왕이 아니라, 그 지역(블레셋)의 왕에 대한 호칭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애굽의 모든 왕을 ‘바로’라고 하는 것과 같다.)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또 야곱으로 그리고 12아들이 나오고 12지파가 되어 애굽에서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나라가 되는 여정은 우리의 신앙 여정이라고 했다. 한 사람이 바벨탑과 같이 인간의 공적을 쌓아서 하늘에 이르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땅, 곧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이끄시는 여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에 이른 사람들의 신앙, 곧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아들로 나타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 안에서는 거듭난 생명이 잉태되는 것이고, 또 밖으로 보면 거듭난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어 또 하나의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이 또한 아들을 얻는 것인데, 그것을 이삭이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야곱을 거쳐서 나라가 되는 것은 그런 신앙이 교회의 신앙이 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 백성의 나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고, 이 땅위 위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법이 다스려지는 사람들의 모임이니, 하나님의 의와 법과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바로 이 땅위 의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통하여 표현하신 것이다.


그런 여정에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서, 야곱에게서, 그리고 야곱의 12 아들에게서 나오는 본성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여정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교회로, 공동체로 살아가는 여정에서 우리 안에서 나오는 사람의 본성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그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세상의 임금들이 아내를 탐내게 한 것도 같이 반복되는 모양이지만 신앙의 여정에서 겉모양이 비슷하게 보이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이삭을 낳기 전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아름다움은 한 사람의 신앙 여정에서 거듭난 생명이 되기 전에 그 사람이 가진 삶의 형식을 말한다면,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사람들의 삶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유대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바울의 능력을 흉내 내다가 오히려 악귀에 당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아브라함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와 이삭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배필이다. 그러니까 사라와 리브가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존재들이지, 이방 왕의 의를 아들로 내는 것을 위한 여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라와 리브가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삶의 모양이 나타내 보이는 아름다움과 영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방의 왕들이 그것을 가지려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때도 그렇고, 이삭의 때도 그랬지만 생각해보면 아내를 주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는 두 부자의 모습을 보면 의당 ‘그게 남자야?’할 법 한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을 책망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브라함과 이삭의 아내를 취하려 한 왕들을 혼내시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그 의를 나타내시는 삶의 형식도 귀하게 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일 중에서도 아브라함이 처음에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갈 때의 모습을 본다면, 아브라함도 아브라함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생산해야 하는 아내를 가벼이 생각했다는 것에서,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가 삶의 모양을 쉽게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기도 해야 한다. 이러한 것은 초대 교회 시대의 영지주의와 상관이 있다. 아내를 쉽게 생각한다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이 삶의 모양을 가볍게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내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의 모습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보는 이방인들의 눈에 그 아내들이 심히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은 아내도 미인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아름답게 나타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교회에 다닌다면서 저런 짓이나 하다니?’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이 다르기에 신앙의 모든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다 공감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것은 일면 맞는 말이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 중에서 세상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수동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나서서라도 돕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게 없다. 십자가가 그것이다.


십자가가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멸망의 것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되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법,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관점의 차이로 이해할 수 없을 수는 있어도,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 인하여 손해를 봤다고 여길만한 짓을 한다면, 적어도 그 모습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시대에 이방인들이 본 사라와 리브가의 아름다움은 아닌 것이다.


이 중에서 리브가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미 아들을 얻은 다음에 이방인들이 그 아름다움을 탐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깨달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삶의 아름다움을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 곧 사람 지으신 목적을 깨닫지 못한 이들이 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에 대하여 아비멜렉이 말하기를 ‘누구든지 이삭이나 그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겠다.’고 명령한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이들이 생명은 없으면서 삶의 모양만 탐하는 것은 죽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인데, 정작 하나님의 생명은 없으면서 성경을 몸으로 지켜내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죽은 생명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아름다움을 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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