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엘과 에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2. 18. 10:51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의 여정이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 자신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인 생명을 얻게 되는(이것을 전도라고 한다.) 여정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의 신앙 여정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표현하신 것이 아브라함의 일생이라 할 수 있다. 그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여긴 유일한 아들 ‘이삭’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뜻과 육신의 능력으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있다. 이것은 앞서 다른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앙을 가진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것이 표현된 삶과 행동이다. 이삭으로 표현된 것이 이것이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낳을 수 없는 아들이 이삭이었다는 것이 그것이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심령의 상태가 그 여정을 거쳐내어서 하나님이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실 때, 곧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받고서 낳은 아들이 이삭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럴 조짐이 없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 여종을 남편에게 동침하도록 하여 낳은 아들이다. 이는 사라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일을 걱정해서 자신들의 육신의 생각과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여 자신들의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낸 결과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늘 있는 일이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지키는 것에 관한 것이 그것이다. 이삭의 신앙, 곧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한 사람 안에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이 있는 사람은 성경의 말씀을 자기 힘으로 지켜내지 않는다. 그럼 무엇으로 지켜내느냐? 그것은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이 삶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삶을 주관한다는 것은 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은 사람의 유전자와 본성에 의한 것이다. 남자로 나서 남자로 사는 것이지, 나서 어떤 노력에 의하여 남자가 되는 것이 아닌 것이 생명으로 인함이다. 이와 같이 성경의 모든 말씀도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말씀을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키려 하지 않다고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았지만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끈 것이다.


반대로 자기 안에 성경을 지켜낼 수밖에 없는 생명은 없는데, ‘성경을 지키면서 살아야 천국에 간다.’고 하니 때로는 스스로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야말로 바늘로 허벅지 찔러가면서 의지와 신념으로 지켜내는 사람들의 신앙이 바로 아브라함이 자기 육신의 힘으로 낳은 이스마엘의 신앙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시대에 정통성을 주장하는 어떤 화려한 교회에 다닌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는 것이다. 교회를 이고 천국에 갈 것이 아니라면.


이 이스마엘의 일이 아브라함에게서 비롯된 것을 성경에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여정에서 한 때는 누구나 다 자신의 의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시절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철없는 시절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여정에서 그런 마음을 처리해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 안에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는데 그것을 스스로 고백하고 인정할 때 온전한 신앙의 여정으로 간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마엘의 여정을 처리해 내었으면 끝났다고 하면 좋을 텐데, 하나님께서 아들로 주신 이삭에게서 쌍둥이 아들이 나왔는데 그 중의 하나가 또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길로 간 것이다. 쌍둥이의 형 에서의 일이 그것이다. 에서는 부모 이삭과 리브가가 걱정하는 결혼을 했는데 바로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이다. 


물론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는 것과 아브라함이 자신의 의지로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다르지만, 우리 신앙 여정에서 우리 안에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본성이라는 점에서 같고, 또 그것이 우리 안에서 반복적으로 나온다는 점에서 우리 신앙의 여정과 상관이 있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과 왜 반복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먼저 이스마엘과 에서는 전혀 다른 신앙의 모습이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명을 낳을 수 있는 존재로 보시기 전에 자기 육신의 힘으로 낳은 아들이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힘과 육신의 능력을 신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장로는 세울 때에 세상적인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언급한다면, 아브라함의 고향 땅에서 있었던 바벨탑과 같은 일은 하나님의 일을 육신으로 이루어내려는 율법적인 신앙이 아니라, 육신의 능력 자체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흙을 굽고 짚을 넣어서 만들고 쌓아서 하늘에 이르려 했다는 것이다. 흙에 짚을 넣어 만들고 흙으로 만든 벽돌을 구웠다는 것은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을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고 단련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한 이삭의 아들 에서는 아브라함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낳은 아들 이삭에게서 난 아들인데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을 살았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 심령 안에 에서와 같은 본성이 있고, 그것을 처리해내고 가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에서는 무엇을 설명하는 존재인가?


에서가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을 산 것은 이방의 여자를 아내로 취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아내를 이방 여인 중에서 취하지 말라고 했다. 이것은 혈통의 문제가 아니다. 아내는 남편의 형식이다. 하나님이 의를 가지시고 그 의가 사람으로 나타나기에 하나님 앞에 모든 인생이 여자인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에서는 그 아비와 할아버지의 의와는 다르게 가나안 땅 곧 이방의 여자를 아내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 있어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는 온전한 생명, 행위나 공로의 신앙이 아닐 존재의 신앙이고, 또한 성경의 말씀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생명의 본성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다 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그 신앙을 표현함에 있어 이방여자와 같은 형식, 곧 세상의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기성교회라고 할 수 있는 율법적인 신앙을 넘어선 교회들도 많다. 그러니까 성경을 지켜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속한 생명을 가졌기에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교회들도 제법 있다. 그런데 그 중에 보면 그런 좋은 신앙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앙을 계급화한다거나, 더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 내 말을 들으라는 식의 주장과 같은 것이다.


신앙의 그런 모습은 이스마엘로 표현된 율법주의적인 신앙에 비해서는 더 온전하고 장성한 신앙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복음을 가지고 사람을 심판하고, 복음을 기준으로 사람을 계층화 하는 것은 너무나 세상적인 것이다.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하면,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신앙으로 본다면 표준이고 최고봉이지만,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이 좋으면 좋을수록 어떤 모습이 되는가 하면, 더 좋은 신앙을 가졌기에 더 수고하고, 더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단들의 교주가 보여주는 모습이 성경적이지 않은 것도 이것에 비추어 보면 명확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것이다. 더 좋은 신앙,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 신앙과 믿음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을 모르는 이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삼고 십자가에 처형하는 자리에 끌려가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 법인 것이다. 그것이 어떤 아내를 얻을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한 개인의 신앙 여정을 가다보면 이러한 일들은 명확해진다. 자신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던 때가 있고, 그 신앙을 지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자리에 이르게 되어서는 어쩌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 세상적인 방법을 배필로 삼는 여정을 거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쌍둥이로 낳았다는 것에서 우리의 여정에 그런 일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음에 이야기하겠지만 야곱은 아내를 얻기 위하여 14년을 종살이 하듯 한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스마엘과 에서는 전혀 다른 정체성에서 나온 하나님의 의를 저버리는 두 가지 우리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이야기함은 우리가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우리 모습을 인정하는 것을 위함이다.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정하지 않는데 돌이키는 회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으려 한다면,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 모습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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