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죽음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5. 6. 11:30 Writer : 김홍덕

성경의 기록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살리신 죽은 사람은 3명이다. 야이로의 딸(마 9장, 막 5장, 눅 8장),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 7장), 그리고 나사로 (요 11장)이렇게 3명이다. 물론 각각의 사건들 안에도 많은 하나님의 교훈을 살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은, 그 직임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심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람을 살리셨는가? 사람들이 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상태인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자리와 목적을 이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이며, 하나님과 사람은 어떠한 관계인가 하는 것을 회복시켜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다시 살아나는 길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모든 생애는 십자가와 부활에 집약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이고, 죽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곳이며,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는 자리인 것이다.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보며, 이것이 옳다 저것이 악하다 판단하면서 살게 되었다. 그런 세상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는데, 사람들이 보니 한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기에는 영 어설픈 인생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세상에서 위대하고 고상하고 예의 바르고 반듯하며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면 지킬수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라에서도 알아주는 가난한 동네인 나사렛에 사는 목수의 아들이 나타나서는 안식일도 맘대로 범하고, 성전에서는 상을 엎어 버리고, 가는 곳 마다 스스로를 거룩하게 여기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할 뿐 아니라, 세금도 잘 내지 않는 아주 형편없는 행태를 보이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자기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소리를 하니 그들이 볼 때는 어이없는 개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 어이없는 말들이 자신의 하나님을 모욕한다 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여 버린 것이다.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가 하면,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생각은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의 아담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기 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모든 것은, 마치 아담이 스스로가 벗은 것을 정죄하여 무화과로 몸을 가리듯이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은 부끄러운 모습이고, 사람이 저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여 버린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달리시게 된 이유이고 죄목인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모습이 악하다고 해서 처형했지만, 예수님의 모습은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선악과를 먹기 전의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이다. 마치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그 전부터 벌거벗고 있었던 자신을 정죄함과 같이……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와 그 모습을 자세히 보고 그 모습이 나의 모습과 같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이 내 모습이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한다면 나의 정체성도 하나님 앞에서 선악과를 먹기 전의 모습,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어떤 선악의 기준을 들이대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저게 바로 나의 모습이다!”> 인정이 되면, 하나님과의 방향성과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존재의 목적이 회복되어 수리된 시계와 같이 죽음 가운데서 구원을 얻게 되는 그것이 바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권능인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 인정이 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신분이 무엇인가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라고 인정이 된다는 것은 곧 그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 분이신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형상이 없으신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어떤 이 안에 있는 보이지 않던 것이 형상화 된 존재를 우리가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는 것, 즉 하나님 어떤 분이신지 표현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본연의 관계성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라는 것은 위대하지도 않고, 추악한 죄인의 틀에 박힌 죄인의 모습인데, 그것이 어떻게 나의 모습일까 생각해보면 금방은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아도,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못 박은 법을 보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가 연약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스스로를 늘 단련하려 한다. 하지만 나를 단련해야만 제대로 된 것이라는 법 앞에서 우리는 늘 죄인이다.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간음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모세는 간음하지 말라 했는데,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다 간음한 것이라고 하시고, 살인에 관해서는 사람을 보고 욕을 하면 이미 살인한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이 자신을 다스려서 간음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거나 살인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 마음 안에 음욕과 살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인간의 본성인데, 그것을 제어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이다. 즉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마음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유이다.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에 대한 말씀이 있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우리가 하늘까지 탑을 쌓아서 하나님께 이르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벽돌을 만들었다고 했다.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굽자는 것은 사람을 단련하자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흙은 사람이다. 그 흙을 벽돌로 만들었다는 것은 가공한다는 것이고, 불에 굽자는 것은 단련시키자는 것이다. 즉 사람 안에 연약함을 없애고 그것을 쌓고 모아서 하늘에 이르자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관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이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 예수님을 심판한 그 법 앞에 서면 다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어떤 분야에서 노력해도 1등이 되기 어렵다. 1등이 싶어 위를 보면 또 위에 누군가가 있다. 늘 옥상 옥인 것이다. 그러다 설사 1등이 된다 해도 곧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1등이 뭔가, 그 아래의 모든 등수에 있는 사람을 이겨서 죄인을 만든 자리가 1등인 것이다. 도덕에 관해서도, 재물에 관해서도, 공부에 관해서도 가도가도 끝이 없고, 끝에 이르지 않은 모든 인생은 다 1등이 되는 법 앞에서 죄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심판한 법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못 박은 사람들의 법 앞에서 죄인이 되시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이다. ‘종교적인 규례를 잘 지켜야 하나님의 아들이지’라는 가치관 앞에 서면 누구나 죄인이 된다. 우린 누구도 성경에 나오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 모든 것을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모든 것을 어기는 것이라는 것을 문둥병에 관한 성경을 통하여 확인했다. 또한 세상적으로 성공해야 왕이 될 수 있다는 가치관 앞에서도 우리는 늘 죄인이다. 누가 어느 곳에 종사한다 해도 언제나 위에 누군가가 있고, 또 항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또한 우리가 그렇게는 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태초로부터, 이 땅에 예수님께서 사람이 보는 형태로 오는 날까지의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 자신이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요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심판 받으신 그 법 앞에서 다 죄인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이것이 너의 모습이다 하시는 것 안에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심판 받으신 그 법대로 심판 받는 존재이지만, 그것을 인정할 때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 발견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존재 목적이 회복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말 자체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직임이고, 또한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상태에 있었는데,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이 발견됨으로써 나도 살아나는 존재가 되는 완전한 치유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이 바로 나의 사건과 나의 삶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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