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죽음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5. 2. 11:35 Writer : 김홍덕

모든 질병과 또 삶의 결국은 다 죽음이다. 이 세상에 이것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다. 사람도 생명체도 그리고 제품들도 다 그러하다. 죽음이라는 것이 육신으로 보면 분명이 숨이 끊어지고, 호흡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의미를 상실하였을 때 그때가 바로 죽은 것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존재의 의미, 그것이 사라지만 비록 몸이 살아 있다 해도 죽은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시계는 시간을 가리켜 주어야 한다. 즉 주인에게 맞는 시간을 보여줄 수 있어야 시계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그것을 ‘죽었다’고 한다. 아무리 외형이 멀쩡해도 그 시계는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의미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보면 주인의 목적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것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다.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사망 가운데 있다고 했다. 그 말씀을 사람들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숨쉬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상태인데, 성경은 사람이 그 말씀을 읽는 순간에도 그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즉 육신이 멀쩡한데 성경은 사람들이 죽은 자들의 상태 곧 사망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고장 난 시계와 같은 상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어진 목적을 버린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뿐 아니라 온 우주를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시려 하셨다. 사람은 어쩌면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표현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표현이라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어떠한가를 표현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죽음이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 생긴 모습이 어떠한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드셨다 했다. 정확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하셨지만 그것이 이런 모양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신데, 우리와 같은 모양을 가졌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사람은 세상에 있는 것에 비하면 아주 약하다. 모든 동물 중에서 태어나서 자립하기 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가장 길고, 유일하게 혼자서 출산하지 못하는 동물이며, 동물과 견주어서 이길 수 있는 것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 밖에 없다. 육신의 경쟁력은 사실 별로 없는 존재이다. 반면에 인간은 온 우주를 그 마음과 눈 안에 다 넣을 수 있고, 그것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의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가 있을 때,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짐승들을 아담에게 데려 오셔서 동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하게 하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하시는 만물 중에 특별한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는 말씀인 것이다. 또한 그것이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사람에게 주셨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춘수 시인도 이름을 불렀을 때 꽃이 되었다고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특성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려는 본성이다.

 

사람이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어떠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관계는 어떤 공통성에 서로가 동의할 때 그때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하실 때도 사람이라는 이름과 의미가 이미 부여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이고, 그것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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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은 바위를 쪼개는 바람이나, 흙을 불사르는 불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것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은 이미 다 하나님께서 번개와 태풍과 또한 육체적으로 뛰어난 동물들을 만드심으로 다 표현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표현해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그것이 아니라 그런 것에 대한 의미 부여인 것이다. 마치 그 이름을 부르듯이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되려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해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그 의미를 알고 부여해가는 것에 그 마음을 두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품성은 볼품 없는 것으로 여기고, 오히려 위대하고 강해지며 사람 안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욕망을 통제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의 사건인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배고파서가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려고>한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의 방향이 전환되는 반역이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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