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중풍병자의 치유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4. 26. 14:28 Writer : 김홍덕

성경은 행위 규범이 아니다. 생명의 말씀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어떤 행동을 한다고 그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개그맨이 개와 같이 행동한다고 해서 개가 되는 것이 아니듯, 생명이라는 것은 어떤 행동을 신념과 의지로서 따라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 있으면 그 모든 것을 다 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천하에 둘도 없는 개그맨이 개 흉내를 내는 것 보다, 개로 태어난 강아지들은 그냥 개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표현이 어떤 행위 규범과 같이 표현되었더라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생명으로 나기만 하면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기만 하면 모든 말씀이 자기의 삶이 되는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성경을 생명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행위 규범으로 보면서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여기고 가르치며 배우고 노력하는 그 모든 가치관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 바리새인과 같은 가치관이요 안목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어떤 행동을 함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여긴다. 게다가 그것을 교회가 가르치고 있다. 그런 가치관은 예수님을 만나게 할 수 없고 오히려 바리새인과 같이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런 행위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기준에 의거하여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행위로서 유대인들을 많이 화나게 한 분이다. 유대인들이 정한 행위 규범을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못 박히셨는데, 그 예수님께서 행위로 공로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만나 주시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영적인 중풍병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풍병자가 치유가 된다는 것은 그러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의 생각이 정상적으로 몸으로 표현되듯이 말이다. 중풍병자가 그렇게 되면 그것이 바로 치유인 것이다. 그래서 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은 지붕을 뜯어내고 그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한 것이다. 지붕은 하늘을 가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바리새인과 같은 생각이다. 지붕이 하늘을 가려 하늘의 뜻인 비가 땅에 이루어지지 않게 하듯, 바리새인들과 같이 행함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하는 생각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게 가리는 것이기에, 그것을 뜯어내고 병자를 예수님과 만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들이 지붕을 뜯어내었을 때, 그 때 이미 그 병자의 병은 치유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게 지붕을 뜯어내서라도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것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같은 가치관에 가려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채 계속 하나님의 뜻이 내 삶이 되지 못하는 중풍병자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들은 지붕을 뜯어내고서 예수님을 만나려 한 것이다. 그들의 그런 생각이 이미 중풍을 이긴 것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생각을 벗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피라미드와 같이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위로 위로 갈수록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천하고 낮은 죄인의 자리인 십자가의 자리로 가신 예수님을 만나려고 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진정한 죄 사함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다’ 하심으로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자신의 자리를 인정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를 인정한다는 것이기에 그것은 당연히 죄를 사함 받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중풍병자가 만나려 한 예수님은 위대해지고 세상에서 성공할수록 인정받는 그런 가치관 속의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의 자리로 가신 예수님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 십자가의 자리에 있는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원래의 자리인 것이다. 그 자리를 수용한다는 것이 바로 머리의 생각을 몸이 받드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에 내가 순종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벌거벗겨졌고, 손과 발에 못 박혔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셨고, 그 신분은 죄인인 자리였다. 그것이 오늘 나의 모습이라고 인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 행동으로 전달이 되듯 십자가가 나에게 나의 자리로 인정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그 사람에게 중풍병자와는 다르게 잘 전달이 되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바로 중풍병자가 치유되는 것이다.


중풍은 머리의 생각을 몸이 받들지 못하는 병이다. 영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는 상태가 그것과 같다. 그리고 그 상태를 성경은 죄라고 한다. 그러므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서 고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두신 그 뜻과 목적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서 마치 머리의 생각을 몸이 받들듯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이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사람의 죄가 용서 받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것을 위하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보이심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서로에게 있어 서로의 죄를 사하여 주는 것에 이르러야 한다. 이는 주기도문에서도 말씀하신 것이다. 가버나움의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심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참람’하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아시고 이르시기를 “어찌하여 마음에 악(惡)한 생각을 하느냐?”(마 9:4)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 9:6) 하시었다. 여기에 나오는 인자는 바로 사람의 아들 인자(人子)이다. 즉 사람이다.


즉 이는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모든 행동으로 범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말씀이 아니다. 중풍 병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그 사람의 생각과 삶에 정상적으로 반영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모습이 연약하고 때로 세상적인 규범에 대하여 죄도 범하고 종교적인 계율도 지키지 못하는 상태 그 자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감히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 잘못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의 모습이 초라하고 볼품없고 연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상태를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는데 사람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고치려 하여 잠도 안자고, 욕망도 제어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은 원래 그렇다. 그것을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죄를 부여하는 것은 오직 그것 하나가 안 되어서 그런 것이다. 즉 사람이 연약하다는 것, 그 연약함을 가진 상태로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것,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는 사람의 모습을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 때문에 사람이 서로를 죄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만 없어진다면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가신 이유가 바로 그런 연약함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계율을 지키지 못하고 세금도 안내는 등 세상으로 온 기준과 법과 규례를 어기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은 그럴 수 없게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영적인 중풍이 고침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죄를 사함 받았다는 것이고, 그렇게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은 자신도 다른 사람을 볼 때 세상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니 죄를 물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서로 죄를 사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함을 보여 주시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죄를 사한다고 하는 것을 참람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은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늘 판단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생각이야 말로 악(惡)한 생각이라고 하셨다. 악이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여기는 그것이 바로 악한 생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사람을 볼 때 자기가 가진 세상적인 가치기준으로 판단하고 심판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에서 죄를 면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마저 그 심판으로 죄인이 되셨는데, 하물며 우리겠는가? 그러나 그 예수님께서 그렇게 심판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도 늘 그런 심판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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