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맹인을 고치신 예수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4. 24. 11:46 Writer : 김홍덕

맹인이란? 빛이 없어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세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 맹인인 것이며,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 맹인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태초 이전의 상태인 것이다. 그것이 맹인이다. 


그러한 사람이 맹인이기에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본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제자 빌립에게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이라고 하셨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그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봄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것이고, 그것은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보는 상태가 된 것을 말씀 하심이 아닌가? 그것이 바로 맹인이 고침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둡고 하나님 세계의 태초가 열리지 않은 맹인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데,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치유의 완성이요 진정한 치유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교회에 다닌다고 그리고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다짐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믿는 것이라도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안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5:22-23) 

이란 말씀을 하셨다.


이는 마치 우리가 TV에 나오는 대통령도 또 연예인도 운동선수도 알고 그들이 막강한 권력의 대통령인 것과 그들이 연예에 재능이 있는 것과 천부적인 운동 감각으로 운동을 잘하는 선수라는 것을 알고 또 그들의 권력과 재능을 믿지만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것은 맹신이고 자신의 신념이고 자신의 다짐을 믿는 것일 뿐이다. 그러하기에 그것으로는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부분이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점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모르신다고 하는 그러한 상황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왜 그러한 문제가 발생하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정체성과는 다르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결정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만약 오늘 하나님을 믿노라 하며 사는데, 세상을 보니 잘못된 것이 많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많다면, 그것은 불이 꺼진 어두운 방에 들어간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 밝음이 있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와 같이 나에게 빛이 비취고 있다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불만이 없을 것이다. 밝은 곳에 갔는데 왜 거기 있는 물건과 부딪히고 다투겠는가? 그럴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렇듯이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하나님이 주신 빛이 비취고 또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수 있는 빛이 있는데 왜 그렇게 살겠는가 생각해 본다면 오늘 내가 맹인인지? 아닌지? 예수님께서 내 앞에 계신데 정말 치유를 받아 그 분을 보는 사람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명의 맹인들이 예수님과 마주 섰을 때, 내 앞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알고 보기를 간구했다. 그러나 눈을 뜨지 못했다면 그 맹인의 눈 안에, 그 맹인의 인식 세계 안에 예수님의 형상이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듯 예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그 인식 세계 안에 각인이 되듯, 오늘 나에게 예수님이 의미 있게 다가 올 때, 그때 비로소 내가 눈을 뜨게 되는 것이지, 내가 연예인을 알 듯 예수님을 믿는다고 다짐한다고 눈을 뜨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께서 빌라도의 뜰에서 심문 받으실 때부터 시작해서 그 모습을 본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었지만, 정작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 본 사람은 백부장 한 사람 밖에 없었지 않았는가? 그 백부장이야 말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니 어떤 세계가 열렸기 때문에 그러한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백부장이 본 예수님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발가벗겨져서 당시 최고 극형인 십자가형을 받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는 죄인의 모습을 보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라고 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던 사람들도 다 배신했고, 3년간 따라다니던 제자들마저 다 떠난 초라한 한 사람의 비참한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보게 되는 새로운 세계가 그 백부장에게 열렸던 것이다. 그 백부장이야 말로 진정으로 맹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되는 치유가 자신의 것이 된 사람이다. 눈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으니 하나님의 세계를 본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즉, 세상에서 좀 더 위대해져서 사람들 앞에 높임을 받았을 그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 믿노라 하는 사람들이 상을 받게 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하는 수상 소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어찌하랴? 예수님께서 그렇게 높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정하신 분이 아니신데……. 


예수님은 인생이 처할 수 있는 가장 천한 자리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정하심을 잊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신앙으로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며, 하나님의 빛이 없는 것이며, 빛을 인식하지 못하는 맹인이요, 하나님의 세계가 아직 태초를 만나지 못한 치유 받지 못한 맹인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그것을 신앙이라 가르치는 교회들이 있으니 그런 교회가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큰 교회인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와 상관이 있어지는 것이다. 한껏 높아져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세상에서 성공할수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면, 40일 금식한 사람이 더 신앙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사람들의 육신의 병을 기도로 고치는 것이 더 좋은 신앙이 되는 것이라면, 과연 몇 명이나 그 자리에 갈 수 있으며, 몇이나 그런 예수와 상관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에 그래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된다면 그건 만민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가 아니다. 그건 엘리트만의 예수일 뿐이고, 크고 높은 사람들만의 예수일 뿐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자리는 다른 자리이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성공하여야 왕이 될 수 있는 로마의 법과 종교적인 모든 것을 육신으로 지켜내어야만 신앙이 있는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법으로 볼 때 처형할 수밖에 없는 실패자요 죄인이 되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인 것이다. 우리도 세상의 성공과 세상의 윤리 도덕과 또 종교적인 규범을 준수하는 것을 내 신앙의 척도로 혹은 그래야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기준으로 제시 받는다면 다 죄인이고 실패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리고 그것이 내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내가 상관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같은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뜻이며, 그런 고백이 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두신 목적이 열리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태초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빛이 비취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과 의에 대하여 맹인이었던 우리가 치유를 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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