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병자들을 고칠 수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아니 그래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까? 그것을 안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왜 병자들을 고치셨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될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영지주의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영지주의의 출발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이 해 보려고 하는데 안 되기 때문에 생겨난 타협점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예수님과 같아져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아니 우리가 예수님의 무엇을 따라가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과 같이, 물 위로 걸어 다니고, 5,000명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 불려 먹이는 것을 그 모양 그대로 따라 하기를 원하셨다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실 것이 아니라 다 천사나 영으로 만들었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영지주의의 생각도 그와 같은 맥락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으로 또한 육신이 없는 신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이심은 그것을 따라 하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기적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이 발견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악과 어떤 영적인 질병 가운데 있었는지를 육신의 질병을 통해서 알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그 육신의 질병을 고치심으로 예수님께서 육신의 질병을 고치시듯 우리의 영적인 질병을 고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신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기적은 육신의 병을 고침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병든 것을 고침 받아서 자신이 누구인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그것이다. 진정한 기적은 사람이 변하는 것이고, 진정한 치유는 그 존재의 정체성이 회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치유의 기적은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치유는 영적 치유이고 존재의 회복이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치유의 사건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병든 모습이었던 것을 치유 받는 것이 핵심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병자들을 고치시며 우리에게 보여주신 교훈이요,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이 교훈을 주는 것에만 목적을 두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기적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지 모르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있으신 분이시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하셨던 그것은 다 각론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예수님의 기사는 단 하나 하나님께서 주신 그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것뿐이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병자도 고치시고, 성전의 상도 엎으시고, 자신의 목숨도 버리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도 그 목적을 위하여 행하신 것이지, 그 행사, 그 기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적을 얼마나 따라 할 수 있느냐가 신앙의 척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즉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신 뜻을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과 삶을 통하여 자신의 이야기로 받느냐 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척도이고 믿음인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많은 병자를 고치셨다. 맹인도 앉은뱅이도, 귀머거리, 중풍병자, 귀신 들린 자 등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나중에는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다. 그러면 그 많은 병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것인가? 그것을 하나하나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오늘 나의 이야기로 받아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객관적인 사실로 믿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늘 나의 이야기로 듣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적인 관점이다. 만약에 성경에 나오는 사실을 객관적인 사실이었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사로와 같이 그 사건의 당사자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을 보는 오늘 나에게는 그것을 사실로 믿는다는 의미 외에,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즉,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의 믿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사실인 것은 사실이다. 예전에 사람들이 천동설을 신앙처럼 믿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천동설을 믿고 있을 때에도 지구가 돌고 있었던 것과 같이, 세상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기적을 믿지 않아도 그것이 사실이면 사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다는 것을 믿음의 본질이라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의 모든 치유의 기적이 오늘 나에게 의미가 있게 다가 올 때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진정한 믿음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병자들의 병을 고치신 것이 그 병자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사로를 살리심이 어디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한 것인가? 그것이 아니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쳤다는 것을 사실로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나사로를 위해 나사로를 고치셨다고 믿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즉, 예수님이 기적과 같이 병을 고치셨다는 것을 실재 있었다고 믿는다는 것만을 믿음이라 하는 것은 그 사실을 믿는 것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믿는 나의 믿음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이 되었든, 아니면 어떤 영적인 의미에서든지 오늘 나의 어떤 병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치유가 될 때, 그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병자들을 치유하셨던 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고, 그 때 예수님을 믿는 분명한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육신이나 고치자고 오신 분이 아니시기에 진정한 예수님의 치유는 우리 육신의 질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영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을 육신의 병을 치유하심으로 예수님의 직임, 즉 사람을 구원하고 회복하게 하시는 것을 보이시고 설명하시기 위한 사역이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모든 치유와 기적도 다 비유인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늘 본질이라는 것이 있다. 자동차의 본질이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의 본질은 운송이라는 본연의 목적이 본질인 것이다. 사람을 운송하는 것, 사람이 원하는 곳에 편리하고 빠르게 가는 것이 자동차의 존재 목적이고 그것이 자동차의 본질이다. 현대적인 디자인이나 평안함 그리고 첨단 기능과 같은 것은 다 운송이라는 자동차의 목적을 위하여, 그 목적으로 인하여 발생된 기능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 아무리 좋아도 운송이라는 목적을 이행할 수 없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다.


이렇게 세상이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내용과 그것이 표현된 외형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표현양식이 필요하셔서 세상을 만드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것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창조의 섭리로 작용했기 때문에 그 섭리 안에서 만들어진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내용과 형식이란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것 역시 그것은 어떤 것에 대한 표현 양식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과 삶이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된 하나님의 표현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 표현 양식을 치유하셨다는 것은 분명히 본질에 대한 메시지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게 본질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형식을 다루는 모든 것을 비유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치유는 또 하나의 비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유의 목적, 즉 본질이자 내용이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영적 치유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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