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축이 사람에게 길려진다는 것은 사람이 그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육축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 되기 위하여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존재 목적을 가진 존재에게 자신의 삶을 의탁하는 것은 주인의 삶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 주인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주인이 복수의 개념이 될 수 있는 것이다.(이것은 우리의 형상이라는 부분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것 처럼  곰이 마늘과 쑥만 먹어서 그 몸이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돼지 삼겹살이 사람에게 먹혀서 사람이 되는 것이 돼지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돼지를 기르는 목적이 그것에 있기 때문이다. 개가 사람의 반려동물로서 사람을 즐겁게 유익하게 하는 것이 존재 목적이다. 그러므로 개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주인의 삶에 속한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에 관해서 바울 사도는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롬 8:19)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 즉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존재가 나타나는 것을 고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축이 사람에게 길려진다는 것은 그 목숨의 모든 것이 사람이 가진 목적에 수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육축의 정체성이다.


이와 같이 육축의 존재 목적을 사람이 가지고 있어 그 정체서이 땅에 기는 것과 짐승과 다르게 분류가 되는 것은 목적 아래 자신을 의탁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존재 목적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 바로 천지창조의 과정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알다시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 그 부모도 아니다. 자식의 삶을 부모가 선택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다 부자고 의사고 변호사일 것이다. 그렇듯 사람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 그것은 누군가가 나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천지창조의 과정인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것 같지만, 그리고 예수 믿는다면, 교회에 다닌다면 다 그런 사람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앞에서 땅에 기는 뱀이라는 존재도 적어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세상의 법을 좇아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은 아는 존재라고 했다. 땅이라는 것이 세상을 말하는 바다에서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땅에 기는 것이나 짐승이나 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고, 이 세상이 자기의 고향이 아니라는 것은 아는 존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노라하고 어떤 것은 선하다, 또 다른 것은 악하다고 규정하는 마음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다 땅에 기는 기독교인이고, 신앙의 목적을 자신에게 두고 있다면 다 짐승과 같은 신앙인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을 보면서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할지 모르지만 미안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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