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는 목적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자신이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기를 구하고, 평안하게 되기를 구하고, 또한 이 땅에서 영광을 얻게 되기를 구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다 존재와 신앙의 목적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 아무리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라고 교묘하게 변론해도 다 그것은 속이는 것일 뿐, 자신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공식을 가진 모든 이들은 다 짐승과 같은 존재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기복신앙이라고 한다. 물론 기존의 교회에서도 기복신앙을 떨치려 하지만 실상은 그 중심에 있다. 교회에서 장로가 되려면 세상적인 조건이 좋아야 한다. 이것의 뿌리는 세상적으로 잘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셨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러한 생각이 결국은 기왕이면 좋은 것일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게 되고, 교회도 화려하게 짓고, 자신의 삶이 윤택해 질수록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자신의 삶을 윤택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즉 자기 신앙의 목적이 자신에게 있는 사람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세상에 두고 있는 것이다. 마치 짐승이 초원을 자기의 집으로 삼듯이 말이다. 좋다는 모든 것이 다 세상적 기준으로 좋다는 것 아닌가? 좋은 자재로 교회를 지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에서 좋다는 자재를 말하는 것이고, 내가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여긴다는 것은 더 적날한 것이다.


또한 신앙을 가졌다 하면서 사람이 가진 육신의 어떠함에 대하여, 또한 육신의 행동에 대하여 어떤 것은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은 악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마음을 가진 모든 신앙은 땅에 기는 뱀의 마음을 가진 것이다. 싸가지 없다고, 교회에서 인사하지 않는다고, 또 헌금 많이 하지 않는다고, 지각한다고, 또는 세상에서 실정법을 위반했다고 비난하는 모든 것은 다 육신의 행위를 보고 선하다 악하다 판단하는 것이다.


사람이 싸우고 다투는 이유는 딱 한가지라 했다. <너는 틀렸고, 나는 맞다> 이것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다툼 가운데, 또는 갈등 가운데 있다는 것은 다 이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선과 악에 대하여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땅에 기는 짐승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천지 창조의 과정에서 옆길로 간 것이다. 결국 땅에 기는 것과 짐승들과 육축 중에서 다음 단계로 가는 것은 육축이기 때문이다. 이는 육축은 자기 정체성을 주인에게 맡기는 존재이고, 이것은 하나님께 사람이 자기의 정체성을 의탁하는 것에 대한 예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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