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엘리바스의 말에 대하여 역시 욥이 반론을 합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2라운드에서는 주제가 욥의 상태에 대한 분석에서 약간 비켜나서 세 친구들의 말이 어떤 정당성이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 라운드에서 욥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친구들은 욥이 자신들의 말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하고 있고, 반대로 욥은 그들의 말이 오히려 괴롭다는 것을 말합니다.


욥은 엘리바스의 말을 ‘나도 많이 듣던 말’이라고 하고, 또 욥을 번뇌케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욥 16:2) 이러한 말에 대하여 뒤에 이어지는 빌닷과 소발은 욥이 자신들을 어리석은 자로 본다고 하고, 모욕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흥분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세계라도 본질을 알고 있는 사람이 본질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위를 듣고 보는 것은 큰 고통을 줍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지 못하고서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입니다. 욥이 말하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욥기가 시작 이후 욥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로 사람을 의롭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양심 때문입니다.


하지만 욥의 고난은 욥의 행동이 하나님께 죄를 번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욥의 친구들의 말에서 그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기준으로 의롭게 여기시기도 하고 고난을 주어서 그 죄를 깨닫게 하시기도 한다는 개념입니다. 욥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다르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이나 욥이나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표현들은 동일합니다. 세 친구들도 하나님을 전능하다고 하고, 욥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어느 종교나 다 기도라는 말을 쓰는 것과 같은 모양새이기도 합니다. 기도라는 말은 모든 종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기준으로 보면 모든 종교들의 기도는 그저 회칠한 무덤과 같은 것일 뿐입니다. 물론 기독교나 천주교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종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기도를 예를 들어 더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는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기 필요를 구하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그 뜻을 묻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경건으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욥의 말과 같이 하나님은 사람의 변호나 도움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그런 경건의 착각이나 자기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나 모두 방향이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에서는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대 전제는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고, 그것이 우리가 죄를 사하여 주는 것이고, 또 우리 죄를 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가 가진 본질적 의미고 그 방향은 분명히 하나님에게서 사람에게로 입니다. 종교가 가진 기도의 방향과 완전히 반대입니다.


이렇게 그 본질에 대한 개념이 다르지만 말은 함께 사용합니다. 욥과 그의 친구들도 같습니다. 고난에 대하여 전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지만 같은 말을 사용합니다. 그것도 똑같이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친구들은 욥의 고난은 욥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욥은 오히려 그들의 그런 말이 곤고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기를 읽고 있는 우리야 욥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전제를 알고 있는 상태로 봅니다. 그러니까 스포일러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그와 다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기도원이나 목사를 찾아가는 것에서 자신에게 임한 일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의 상황도 마찬가지이고,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기도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자기가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거나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는 것임을 모르기 일쑤인 것입니다. 사람은 그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 자기 본성이 되기를 바라고 그 본성이 이끄는 삶을 살기만 하면 그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둘 다 기도라는 것을 하는 것은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노라며 기도한다 말하거나, 육신의 형편이 여의치 않다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은 지적재산권이나 자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신 것은 그들로 인하여 피해를 봐서가 아닙니다. 단지 그것을 볼 때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 의의 본성이 분노케 한 것입니다. 욥이 친구들의 말이 고통이라고 한 것은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욥은 16-17장에서 사람들이 그들의 말로 자신을 대적하고 조롱한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친구들의 입장이야 같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욥에게 자신들이 가진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욥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앞서 기도를 예로 설명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로 말하는 사람들의 말은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들에게 아주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특히 그 말하는 사람들이 친구나 가족과 같은 사람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이러한 대화의 구조 속에서 욥의 친구들의 태도는 자신들이 가진 의는 옳은 것이고 욥을 위하여 말하고 있는 것인데 욥이 수긍하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욥을 위한다는 그들의 생각과 말이 하나님은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고 있는 욥에게는 오히려 조롱하는 말이고 고난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의를 사수하고 하나님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대했더니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권세와 정의는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런 신앙이 늘 기도하는 방향, 곧 땅에서 하늘로 향하는 바벨의 방향과 같이 땅에서 다수결의 원칙, 육신의 평안을 복으로 여기고 세상에서의 성공을 영광으로 여기는 큰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 권세가 예수님을 못 박았듯, 세상 사람들이, 자기 경험이 주는 알량한 지식과 말로 욥에게 권면하는 것이 욥에게는 오히려 큰 고난이요 조롱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욥의 고난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알고 있지만 그것이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기에 그것이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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