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3-14장) 욥의 기도 –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2. 09:51 Writer : 김홍덕

욥의 기도 전반에는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인생인데 그냥 죽는 것이 더 좋은 것이 아닐까?’ 하는 욥의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하찮은 자신에게 손을 대지 말아 주셨으면 하는 것과 세 친구들과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 되지 않게 해 주시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게 될 것이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욥의 기도와 말 속에 있는 기본적인 생각은 죽으면 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육신이 겪는 고통이 크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과는 다릅니다. 사람이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께 구하고, 육신의 어떠함이 하나님께 주신 복 혹은 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누가 자신이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없는데 고난을 받는 것이라 여기면 욥의 아내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치관은 수고한 만큼 얻는다는 생각, 신이나 하늘이라 총칭되는 사람 이상의 존재가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보응한다는 생각, 그리고 크고 많은 것이 위대한 것이고 복을 받은 것이며, 신의 은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수고하고 정직하게 사는데도 인생이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 아니라 어떤 신이라도 다 원망합니다. 하늘 향해 소리치고 손가락질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나 그의 친구들이 가진 안목과 가치관이 의롭고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적어도 자신의 행위로 인한 벌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이는 자신의 행위를 기반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이 친구들에게 자신이 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행위를 인함이라기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의에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가치관과 달리 하나님을 그렇게 바로 안다고 해서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있습니다. 인생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귀하고 귀한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의를 알고 있는데도 육신의 삶은 언제나 그랬듯이 힘들고 곤고하다는 것입니다. 욥기는 그 곤고함을 욥의 고난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욥기를 시작할 때에 사탄이 하나님께 욥의 의로움을 폄훼한 명분은 세상의 가치관을 기반으로 욥이 부유하고 평안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욥도 하나님도 서로가 아는 바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을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의의 기준으로 삼지는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육신을 보전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보입니다.


그로 인하여 고난을 겪고 있는 욥은 육신이 곤고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되니 욥은 하나님의 의를 알고 있는데 당하는 고난은 전혀 이유가 없는 것과 같이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괜히 자신에게 힘을 빼시는 것과 같이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자신이 죽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욥기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과 육신의 삶이 겪는 모든 것의 이유를 알게 하시고자 하심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욥이 기도하는 마음이나 친구들에게 반론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에 대하여 아직 명확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욥기 후반에 수많은 짐승들을 들먹이면서 욥에게 질문하시는 것도 생각해보면 그 많은 육신을 가진 존재들에게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를 욥이 알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이 근원적으로 알아야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의 아들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겠습니까?


즉 욥이 겪는 모든 고난의 뿌리는 육신의 존재 목적에 있는 것입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고난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아니 그 고난이 목적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것이 친구들의 말과 같이 행위로 죄를 범한 결과가 아니라 엘리후가 말한 것과 같이 생명의 빛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도 육신이 평안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것은 참 어이없는 일인데 그 모든 것이 육신을 주신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 일입니다. 지금 욥의 기도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기에 인생이 곤고하게 느껴지는 욥의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