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2-13장) 소발에 대한 욥의 반론 – 4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26. 14:28 Writer : 김홍덕

욥기는 엘리후가 나타날 때까지는 세 친구와 욥의 변론이 이어집니다. 지금 설명하고 있는 소발에 대한 욥의 반론이 그 첫 번째 바퀴입니다. 27장까지 세 친구와 변론을 세 번 주고받습니다. 그 대화 속의 표현들은 다소간 다르지만 입장은 한결 같습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없다는 입장이고, 세 친구는 하나님께 죄를 범했으니 욥이 고난을 당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한 시각 차이는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보느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욥이 당한 고난이 욥이 행위로서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결과라고 보는 세 친구에게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로 복이나 벌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관점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나 천주교는 물론이고 사람들이 각종 신을 믿는 가치관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욥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를 기준으로 복이나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 확신이 없다면 졸지에 폭삭 망한 자신이 죄가 없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도 사람들은 물만 쏟아도 ‘하나님께 뭐 잘못했나?’ 하는 것을 보면 욥의 주장은 얼마나 확신에 차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고 보면 욥의 신앙관과 세 친구의 신앙관은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거의 거듭난 신앙과 걷ㅂ난 줄 알지만 실체는 그렇지 않은 신앙의 차이 정도의 큰 차이입니다. 욥이 더 온전히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있다면 육신의 삶이 평안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딜레마가 바로 욥기의 기록 목적입니다. 그것을 설명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욥이 세 친구들의 집요한 책망에도 자신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할 말을 하겠다고 하며, 하나님께 자기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친구들의 말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보시고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욥이 아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본성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부인할 수가 없게 된 지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너무 분명한 하나님의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자기 형편이 어떻다고 그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된 상태가 바로 진정으로 아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더 나아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욥에게 사탄이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알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떳떳합니다. 하나님이 두렵지 않다거나 동등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행동으로 하나님을 섬겨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금도끼 은도끼를 바라고 자신의 도끼를 연못에 던진 욕심 많은 나무꾼과 같이 하나님께 성경을 지키는 자신의 행위를 드려서 자기 육신이 평안해지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행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심판하실 만한 행동을 할까 늘 조심합니다. 그러나 욥과 같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안다면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노심초사하듯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 친구와 같이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 행위로 죄를 범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께 잘못하지 않으려고 조심합니다. 이는 실수를 하지 않고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것이라기보다 죄로 인하여 벌을 받지 않고자 함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늘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육신의 정욕에 쓰려고 구하기 때문에 육신에게 고난이 닥치는 것이 두려워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와 같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신앙을 ‘장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행위의 공로를 드리고 그 반대급부로 육신의 평안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평안하고 부유하면 하나님을 잘 믿을 것이라는 명분을 앞세워서 말입니다. 육신이 평안하면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지만.


하지만 욥이 가진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행위를 드려서 육신의 평안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의 하나님을 알기 때문인데, 그 안다는 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거하는 형식으로서 육신을 가진 삶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인생을 살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그 성품을 표현하는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 존재의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자기 인생의 목적인 것도 알고, 그렇게 자기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존귀한지도 알면 그 귀함만큼 인생도 귀해져야할 것 같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아 가고,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서 자라나면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안에 너무 귀한 하나님의 의가 있는데도 인생은 달라지는 것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을 행위로 믿는 사람들보다 인생이 보잘 것 없는 상태가 개선되지 않는 것에 무기력해집니다. 이런 심정은 성경의 많은 선지자와 사도들이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욥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이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자신의 행위로 인함이라는 것은 너무 분명하게 아는데, 그 귀한 것을 알고 있지만 오히려 친구라는 자들까지 와서 자신의 삶을 비난하는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그것이 욥이 당한 고난의 본질입니다. 욥이 나중에 더 큰 복을 받기 위해서 시험처럼 고난을 당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이 본질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체성도 모르는 것입니다.


욥은 바로 이것을 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사람 안에서 자라면서 그 하나님의 의는 인생의 형식을 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이셨는데, 바로 그와 같이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욥이 나중에 하나님의 질문들을 듣고 자신을 회개하고 고백한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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