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2-13장) 소발에 대한 욥의 반론 -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23. 14:21 Writer : 김홍덕

욥이 당한 고난은 잘못된 행위로 인함이라기보다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만나고, 또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것이 전부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와 ‘그것을 아는데도 인생은 왜 여전하고 곤고한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인생은 그 자체가 고난이라고 여기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현세에서 혹은 내세에서라도 그 고난을 벗으려면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 하는가(DO)를 고민하는 신앙으로는 욥의 고난을 알 수 없습니다. 물론 그 무식함은 자식들이 겪는 고난을 욥의 고난과 동기화시키기는 합니다만.


욥의 세 친구가 가진 안목이 바로 욥이 당하는 고난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오히려 자기들이 가진 그릇된 신앙관으로 욥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그릇된 신앙관은 바로 욥의 상황은 욥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서(DO) 생긴 결과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을 행위로 판단하시는 신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따라서 세 친구들의 말은 말 자체로는 잘못된 것이 없지만 그들의 말과 그들의 정체성이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지전능하다 말하면서 그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울부짖는 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정체성은 모르면서 그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만으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맘대로 규정할 뿐 아니라 그 기준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의 말이 내용은 없고 말만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이라는 것은 사실 여부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이 정체성과 행위(말이 대표적)가 다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욥의 세 친구들은 자기 심령 안에 하나님의 의가 없고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지도 못하는데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현상을 보고 자기가 가진 의로 하나님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거짓말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도 사실 바로 이런 의미이기도 합니다.


욥은 친구들의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그런 것은 짐승들도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짐승들도 다 아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그들 안에 하나님의 올바른 의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친구들의 말은 껍데기만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가면 온갖 말로서 하나님을 표현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자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과 다르기 때문에 그들 속에 없습니다. 즉 욥의 말과 같이 껍데기만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도 ‘외식하는 자’, ‘회칠한 무덤’, ‘선지자 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지기 육신의 문제를 의탁하고, 그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드리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합니다.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인데, 자기의 욕심이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자기가 바라는 것(육신의 정욕)에 대한 가치를 높게 두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급부도 상당 수준이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자신조차도 그것을 다 채우지 못한다는 것과 사람이 다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만 말을 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처절하게 하나님께 뭔가를 해 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볼 때 하나님께 온전한 행위를 드리지 못한 결과로 폭삭 망한 욥이 스스로를 의롭다 말하고, 그것을 권면(사실은 심판)하는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욥에게 자신들도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행위를 하나님께 내어 놓으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들의 말이 이렇듯 내용은 없고 껍데기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도 행위가 온전하지 못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이 엄청난 두려움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두려워해야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는 자신이 온전하지 못하여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의 정체성을 인하여 두려워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욥이 소발의 말에 대하여 반론을 하는 내용들에는 그의 친구들이 가진 신앙이 내용은 없는 빈껍데기뿐인 신앙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듯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은 노릇하는 것이고, 자신조차도 지킬 수 없는 행위 기준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할 뿐 아니라 그 기준으로 사람을 심판하기 때문입니다.


이 욥과 세 친구의 대화는 앞으로도 계속 이런 패턴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을 안다고 해도 인생이 달라지지 않고 이렇듯 곤고하다고 말하고 있고, 세 친구들은 욥의 신앙에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을 행위를 의롭게 여기시는 분으로 보고 있는 시각 차이가 대립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욥의 이야기는 소설이라든가 아니면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도 변함없이 사람들은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주신 육신을 가진 인생을 주신 목적에 반하여 오히려 그 육신을 어떻게 하면 평안하게 할 것인지를 궁리하고 내일 평안하기 바라며 오늘 하나님께 자기의 행위를 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으로 사람을 보기에 사업에 실패하면 교회에 가자고 하고, 같은 교회의 성도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런 생각을 기반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훈계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욥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말들은 다 껍데기뿐이라고. 왜냐하면 하나님은 행위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욥의 고난이 욥의 행위를 인함이 아니었듯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