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1장) 소발의 첫 번째 변론 –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19. 10:12 Writer : 김홍덕

전능해야 하는 하나님 vs. 전능하신 하나님


소발의 말과 같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인 것은 신앙의 근간입니다. 하지만 욥의 세 친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해야 하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그 신앙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을 어떤 신으로 믿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보고 복을 주시거나 벌을 주신다고 여기는 신앙관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 행위를 경건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어떤 행위를 하였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기 때문에 기뻐한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하게 “이는 내 기뻐하는 자요”라고 말씀하신 것만 잘 생각해봐도 하나님은 행위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기뻐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자녀를 낳으면 자녀가 무엇을 해서 기쁜 것은 2차적인 문제고, 가장 기본적으로 그 존재가 기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하여 어떤 결정을 하느냐를 두고 하나님의 뜻대로 했는지를 판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대학원을 가면 하나님의 뜻이고, 취업을 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식으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가 가진 신앙관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욥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노하실만한 행동을 했고 그 결과로 지금 이 참담한 고난을 받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 언급하는 바와 같이 욥의 세 친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가진 신앙관이기도 합니다. 사실 더 심각한 것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이 욥의 세 친구와 같은 신앙인지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하는지 보면 압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지는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전자제품 매장에 들어가는 사람이 외투를 구할 리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또한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을 보고 ‘교회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교인 중에 사회적인 성공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욥의 세 친구와 같은 신앙이라 말하기에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하나님께 늘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긴다는 것 자체가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께 바라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바라는 바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판단해서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행동으로 지키려 합니다. 그러면서 그 지키려는 말씀이 신약성경에 있다고 그것은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치장합니다. 


그러나 어떤 말씀을 지키는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을 행위로 지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보답으로 자신이 육신의 평안을 얻겠다는 그 가치관 자체가 이미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생각이고, 하나님을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을 기뻐하시는 분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래고 장사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지 말라고 노하신 것도 이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인들은 그게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 몰지각한 유대인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괘리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것과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기 행위를 드려서 자기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담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반드시 전지전능해야 합니다. 은행에 돈을 맡길 때 그 수익률과 안전성이 담보되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때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자기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인함입니다. 따지고 들면 사람들이 바라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문서로 계약하시지도 않았는데, 사람이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해 주실 거야…’라고 자기 맘대로 생각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원망하거나 아니면 ‘무응답도 응답’이라는 괴변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삶을 주실 때 그 모든 것을 예비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육신 자체가 온전하지 않아서 살면서 행위로 무언가를 매워가야 하는 것이 아님도 알고, 전지전능하신 분이 우리에게 삶을 주셨으니 그 뜻하신 바를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지도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하나님의 성품이 자기 안에 있으니 어떻게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본성으로 있는 것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남자로 난 사람이 남자라는 것을 또 그 본성을 의심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자 만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있으면 하나님이 전지전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 자체가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에 순종하며 삽니다. 아니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남자로 나서 남자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남자의 본성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안에서 생명과 본성이 된 사람은 그 생명과 본성이 하나님의 뜻에서 온 하나님의 성품이므로 그 하나님의 성품에 순종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인하여 자신에게 삶이 주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놀라운 하나님의 뜻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과 그 놀라운 하나님께서 그것을 위하여 자신을 창조하시고 삶을 주셨다는 것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안목이 여기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바라는 것은 현재 자기 삶이 고난이고 평안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것을 바라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늘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하고, 그 구하는 바가 이루어지려면 하나님이 전지전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의 위대함을 알고, 그 위대함을 인하여 자신이 존재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위대함과 자신이 내용과 형식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의 근원이기 때문에 믿지 않으려 해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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