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1장) 소발의 첫 번째 변론 -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17. 13:33 Writer : 김홍덕

모든 것이 거짓인 세 친구의 말


욥기에 나오는 세 친구 중에서 마지막으로 소발이 말을 합니다. 엘리바스는 자기 경험으로 볼 때 ‘죄 없이 망한 자는 없다.’고 했고, 빌닷은 ‘욥의 형편은 욥이 지은 죄의 결과’라고 말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 말들을 하고 있고,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명확하게 알려고 하지 않은 신앙인들이 읽으면 그들의 말도 틀린 것이 하나도 없게 여겨질 것입니다. 


물론 그 말들을 욥기에서 분리해서 따로 보면 그럴 수 있지만 욥기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 안에서 세 친구의 말을 보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노하신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욥 8:7)’라는 말도 하나님께서 노하신 빌닷의 말인 것도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소발은 욥에게 “네가 하나님보다 지혜로우냐?”로 함축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이 말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하나님보다 지혜로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한 소발이 나중에 하나님께서 노하셨다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이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느껴야 성경을 제대로 본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말이라는 것이 신체적으로 말을 할 수 있기만 하면 되는 것 같지만 놀랍게도 말은 주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그 말이 참된 말이 되거나 거짓말이 됩니다. 사람들은 사실과 다른 말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 말과 말하는 사람의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남아일언 중천금’과 같이 자기가 한 말은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도 하시고, 선지자 노릇하는 자들이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이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지 못하는 주제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면서 그것을 시늉했다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아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 그 중에서 “~~하라!”고 하신 것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저 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런 문장으로 된 계명을 행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행위를 의롭게 여기시는 분으로 여기는 신앙을 가졌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모든 순간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행위의 공로나 소유의 드림을 좋은 신앙이라 여기시는 분이 결단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심은, 그것을 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존재적이란 것은 존재의 정체성과 그 정체성 관의 관계만 정해지면 어떤 행위를 어떻게 할  지는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남녀가 결혼을 하면 부부가 되고, 부부가 되면 서로를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부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되었기에 같이 자고 다른 이성과 관계를 가지면 안 되는 것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질그릇과 같이 속을 채워야 온전해지는 존재로 지어진 사람은 그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이냐에 따라 그 정체성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앞에 행위의 공로나 소유를 드려서 의로워지려는 생각을 채운 사람이 있고, 좁은 문을 지나듯 적은 수지만 그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의와 뜻을 담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채워진 것이 자연스럽게 삶으로 나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사는지도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채워진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하라!”는 자신이 싫어해도 하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형편을 보고서 하는 그들의 말 속에서 보는 바와 같이 행위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그릇 안에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어떤 말씀을 어떻게 지켜 행할까?’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약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행위를 의롭게 여기시는 분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형편이 고약해진 사람을 보면 ‘교회에 가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신약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오셔도 그 말만 지키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새는 쪽박은 들에 가도 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친구들의 말은 문장 자체로는 틀리지 않았으나 그들이 욥의 형편을 보면서 욥이 당한 일은 욥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서 일어난 일이라는 안목을 가진 정체성을 심령에 담은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말은 전부 거짓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욥도 소발의 말에 답변을 하면서 ‘너희의 말을 누가 모르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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