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9-10장) 빌닷에 대한 욥의 반론 -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15. 09:28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보는지, 아니면 반응하시는 분으로 볼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단순하게 보면 두 가지 태도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 같지만, 그 선택은 어떤 의를 가졌는지,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보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신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보고,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 즉 본질적 의로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 볼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마저도 자신이 옳다는 대로 믿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반응하시는 하나님으로 볼 것입니다.


이 둘의 차이가 가진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을 어떤 신으로 아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람에게 복이나 벌을 주신다고 여기는 것은 언뜻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 같지만 실재로는 하나님은 사람에게 종속된 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종속되었지만 능력이 더한 신 정도로 보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초한지에 나오는 유방이 한신을 보는 것 같은 것입니다.


욥의 친구 빌닷은 그 말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에 절대적으로 반응하시는 분이라는 의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욥이 지금 처한 상태를 보니 필시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고, 그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셔서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나중을 크게 창대하게 하실 것이라고 권면합니다. 물론 그 창대함은 육신의 복락에 관한 것입니다.


빌닷의 말을 기준으로 욥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한 사람의 신앙 여정은 하나님을 반응하시는 하나님으로 보는 사람(시절)이 있고,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시절)이 있고, 하나님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보는 사람(시절)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욥기를 기준으로 본다면 세 친구는 하나님을 반응하시는 하나님으로 보는 사람들의 시각을 대변하고, 욥은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고, 후에 나오는 엘리후는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경우 엘리후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로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의 안목을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자신이 죄가 없다고 주장을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무 분명히 많은 지탄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탄에 맞서서 ‘예수님이 죄를 다 사했는데 왜 죄가 있어야 하느냐?’라고 반문한다면 아마 그 사람의 모든 인생의 모든 행위를 다 털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죄를 사했다고 네가 죄를 짓지 않느냐?’, ‘예수만 믿으면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는 것이냐?’ 등등 엄청난 비난에 직면할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하나님 앞에 죄를 사함 받고, 그 죄 사함을 받은 은혜를 누리는 곳이 교회이고, 그래서 교회에 가는데, 정작 교회에 가서 죄를 사함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엄청난 저항에 부딪힌다는 것이 정말로 어이없는 것입니다. 그럴 값이면 왜 교회에 가겠습니까? 교회에 가서 사회보다 더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고 죄 사함 받았다면서 사함 받았다고 말도 못하는 것이 과연 정상인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 마디로 죄를 사람의 행위에 기준을 두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농담 삼아 하는 거짓말, 이른바 하얀 거짓말이 죄냐 아니냐와 같은 실로 어이없는 논쟁을 하는 것입니다. 잠깐 답을 이야기한다면 그런 논쟁을 하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행위로 의로워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욥기는 이러한 안목의 차이가 가진 대립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처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행위를 보고 반응하신 결과라고 보는 세 친구의 시각과 사람이 겪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위하여 베푸신 은혜의 경영이라는 엘리후의 시각이 대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에 반응하시는 분은 아닌 것은 알지만 모든 것을 사람을 위하여 주관하신다는 것을 온전히 다 알지 못하는 욥의 모습이 그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욥이 겪는 고난의 본질은 하나님 앞에 행위로 죄를 범하여서가 아니라, 사람이 살면서 겪고 느끼는 모든 것이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이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시고 그 선하시고 의로운 뜻을 사람을 통하여 이루시기 위한 경영으로 보지 못할 때 삶이 고난으로 여겨진다는 것 욥이 겪고 있는 고난의 본질인 것입니다.


욥기의 시작에서 하나님께서 왠지 고의로 욥이 고난을 받게 되도록 사탄을 꾀듯 한 분위기마저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생을 전적으로 경영하신다는 것과, 그 하나님의 경영을 은혜로 알지 못하면 인생은 그것을 고난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심입니다.


욥이 자기 형편을 고난으로 여기고 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9장에서 자신은 하나님이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분이라고 믿는데도 하나님께서 오히려 그런 구분 없이 자신을 대하신다고 한탄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를 사람을 향한 은혜로 알지 못할 때 사람이 인생을 정의내리는 모습인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바라고 하나님의 복이라고 여기는 육신의 평안이 진정한 하나님의 복이라면 바울도 베드로도 스데반도 야고보도 심지어 예수님도 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지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 뜻에 무관하게 다른 사람, 다른 의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육신의 복락과는 아주 무관할 뿐 아니라 육신이 아주 폭삭 망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한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서 그것을 믿어서 육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바로 도적질이고, 세상의 가치와 하나님의 말씀이 섞이는 간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 가진 인생을 주신 것은 그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지를 나타내는 척도로 삼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일이라면 때론 평안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대부분은 수고를 하고 살아가는 것이 용도요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 육신으로 다른 사람이 옳다는 의 앞에서 종과 같이 섬겨 수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삶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저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하나님의 성품이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뜻이 가장 농축되고 본질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결국 육신을 십자가에 드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아들로 드러나심과 같이 우리도 육신을 그렇게 사용하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과 그 뜻이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어 그 육신으로 본이 되시고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과 같이 산다는 것은 육신이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육신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진 어리석은 의와 가치관 앞에 종과 같이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이 육신이 평안하기만 하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욥기에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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