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 만족이 되는 세계로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은 ‘벌레만도 못한 자’라고 고백하거나 기도할 때 자신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벌레보다 못한 존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희생양으로 내어 주는 그런 어리석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치를 알고 가치에 맞게 바꾸고 대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그런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손해 보는 장사 하지 않습니다. 그게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녹일 수 있는 물질을 개발 했는데 그것을 담아 놓을 그릇이 없어서 구한다는 유머가 있는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 존재를 나타내시려고 만드신 형식이자 형상이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녹이는 물질을 담을 유일한 존재가 바로 사람인 것입니다. 천지창조의 모든 과정에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사람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은 그저 하나님이 표현하고자 하신 대로 된 것일 뿐이지만, 단 하나 이 사람이란 존재만은 하나님이 되라고 하신대로 되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자기 판단에 의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고백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신 뜻을 자기 삶으로 담는 그릇이 되기를 바라시므로 만든 존재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너무 온전하게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벌레만도 못하겠습니까? 그것도 사람이 스스로 그렇게 여기면 그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뭐가 되겠습니까? 성경에서 때로 벌레보다 못하다고 하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버리고 자기 뜻대로 사는 죄에 빠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롤렉스시계보다는 시간 잘 맞는 수능 시계가 시계라는 목적에서 보면 더 온전하고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롤렉스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가치에서 보면 벌레만도 못한 것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바로 알지 못하던 시절을 회상할 때는 벌레만도 못하다고 고백할 수 있겠지만 자신을 하나님의 산제물로 드린 사람은 그런 고백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벌레나 드리려고 한다면 또 모를까. 바로 지금 욥의 고백이 그런 것입니다. 사람이 도무지 어떤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사건건 간섭하시므로 사람을 이렇게 곤고하게 하시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이 행위로 하나님께 죄를 지은들 하나님께 무슨 소용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친다고 한들 다 하나님의 것임에는 변함이 없는 것인데 뭔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이러한 고백은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아직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엘리후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사람을 아프시게 하시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생명의 빛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욥 33:19~30)”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잠자는 순간에까지도 늘 말씀하시고 계신다.(욥 33:14-15)”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욥이 알지 못하는 이 한 과정을 말씀하시는 책이 바로 욥기인 것입니다.


욥기는 인생을 고난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이 고난을 참아야 되는 이유와 명분을 주시는 책이 아닙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생각하듯이 고난을 잘 견디면 그 후에는 이전보다 더 나은 육신의 평강과 복락을 주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이 겪는 고난은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지 않으시기에 사람이 행위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로 죄를 범하는 것이고, 그러하기에 행위로 이를 갚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아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 와중에 느끼고 있는 인생의 무게에 대하여 어떻게 볼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욥기에 나오는 세 친구들의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여정에서 무당에게 가서 굿을 하듯이 하나님께 가서 인생의 문제, 육신의 문제, 혈육의 문제, 사업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나님께 어떤 행위를, 성경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를 궁리하는 애굽과 광야의 신앙이고, 욥의 신앙은 세 친구들의 신앙을 지나서 행위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물세례의 과정을 거치고 난 사람들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하게 할 것은 우리가 교회에서 받은 물세례는 여기서 말하는 물세례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물세례 아니라 불로 몸을 지지듯 불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그 구하는 바가 육신의 문제에 매몰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시늉이요 노릇일 뿐입니다. 머리에 물을 적시는 안수나, 침례를 받지 않아도 하나님을 행위로 섬기는 것이 아님을 고백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물세례인 것입니다.


이는 출애굽의 과정으로 보면 요단강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 그 강바닥에서 돌을 가지고 와서 쌓았다는 것은 이제 새로운 법이 삶을 다스릴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전에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지시하는 대로 해야 살 수 있었다면, 이제는 살았기에 그 생명의 능력대로 발을 딛는 곳은 모두 누릴 수 있는 법이 삶을 다스릴 것이라는 것이 자기 삶의 법이 되는 것이 물세례인 것입니다.


욥은 바로 그 신앙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는데 그런 중에도 곤고함은 있더라는 것입니다. 굳이 비유한다면 땅을 얻기 위해서는 육신으로 걸어가고 싸움을 해야 했던 것과 같습니다. 물세례 이전 광야와 같은 신앙에서도 싸우는 것이 일이었는데 요단강을 건너서도 늘 싸우기만 하는 것에 대한 의문과 같은 것이 욥의 한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이전과 같이 싸우기만 했을 뿐인데, 하나님의 나라가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나라가 생겼다는 것은 다스리는 의가 현실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뜻하신 바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의 삶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아프지만 그것이 결국은 생명의 빛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우리는 고난과 같이 느끼면서 살았던 것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생명인 것을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욥이 마지막에 크게 회개하는 것은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이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만족이 되는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무나 만날 수 없을 뿐이지. 그 사람들을 만나려면 자기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생명을 가진 사람들의 절대 수치는 작겠지만 이는 좁은 문이기 때문이지만 알고 보면 엘리야의 때에 말씀하신 7,000명과 같은 사람들이 넘치고 넘치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아직 망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욥의 이 한탄들이 의미하는 바가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면 머지않아 위로함이 만족이 될 것입니다. 욥의 최후 고백과 같이. 인생이 나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는지 아찔하다는 고백이 절로 나올 것입니다. 살았다는 것이 그렇게 영광스럽고 삶을 주셨다는 그 자체가 너무 감사해서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것입니다. 그때는 이 삶이 주는 고난이 새로운 가치가 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의 증거로서 감사할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을 그렇게 소비하여 가는 것임을 알게 되어 평안할 것입니다. 욥기는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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