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범한들…


엘리바스의 말에 대한 욥의 첫 번째 변론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7장 20절 나오는 말씀과,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욥 7:20)


그리고 그에 앞서서 우리가 한 번쯤은 들어봄직한 말씀인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욥 7:17-19)

과 같은 말씀들일지 모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동안에 한 번 정도는 욥과 같은 고백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단계의 차이는 있습니다. 굳이 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그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공로를 드리는 신앙(사실 신앙도 아니지만)을 가진 사람들도 아마 욥과 같은 고백을 하긴 할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서, 하나님께 충분히 드린 것 같은데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러나 욥의 고백은 말은 같아도 그것과는 사뭇 다른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욥으로선 자기가 하나님께 행위로 죄를 범한 것이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인생을 곤고하게 하시는 것은 더 답답한 것입니다. 세 친구와 같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으니 받는 고난이라면 회개하면 되기라도 할 것 같지만, 욥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아닌데 받는 고난이니 말 그대로 하소연할데도 없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단언컨대 모든 신앙인들이 알고 있는 마음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 어떤 행위를 드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는데, 인생이 곤고하게 느껴지는 것은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막막함을 느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이 곤고함에 처하고, 원하는 대로 잘 되지 않을 때에 그 원인을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으로 보고, 무엇을 고치면 될 것인지,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알아서 행하는 것이 해결 방법이라고 여길 때는 기도를 하든지, 새벽기도회를 나가든지, 하다못해 주기도문을 백번 쓰든지 하면 죄책감이라도 들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는 그럴 수도 없기 때문에 느끼는 그 막막함은 정말로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욥의 마음이 그것입니다.


인생이 잘 풀리지 않으면 ‘기도하면 돼’라는 말이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시는 것은 아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절대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사람이 원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포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예를 들어 자신들이 선교하러 가겠다는 것을 마음에 정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사람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전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 시대에 어떤 종교적 행위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반의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 경건함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그 어느 하나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위한다고 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것을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뜻이 흙으로 지은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방향이 반대라면 목숨을 하나님께 내어 놓았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 이 하나님의 의를 알고 있는 중에 인생이 곤고하다고 느끼는 그 마음은 정말로 겪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육신의 일을 구하는 신앙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께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렇게도 신경을 쓰시는지?’ 라고 반문하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이 왜 곤고한가 하는 것이나. 반대로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으시니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한 들 또 무슨 상관이냐며 반문하는 이 한탄들은 하나님께서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라고 여겼다면 세 친구의 말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믿는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를 찾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신앙은 분명히 하나님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입니다. 그 신앙 안에서는 이 욥의 고백을 이해할 수 없고, 오히려 이 고백을 세 친구들의 권면에 빙의된 듯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려 하는데 잘 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면서, 이렇게 하나님을 행위로 잘 섬기지도 못하는데 이렇게 귀하게 여기시는지로 왜곡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범한다고 하나님께 아무 문제가 없음에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일일이 간섭하신다고 여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믿는다면 이 욥의 고백은 피할 수 없습니다. 행위로는 인생의 곤고함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안목이 이미 자기 안에 있는 중에 겪는 삶의 곤고함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욥이 겪는 것과 같은 인생의 곤고함이라는 것이 기도한다고, 회개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는데 인생은 곤고하게 느껴지는 그 상황은 정말로 답답한 것입니다.


정말로 이런 상황은 말 그대로 <위로는 되지만 만족은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잘 사는 것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럽지 않다고 하려니 마음에 씁쓸함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너는 돈 있냐? 나는 예수 있다!’라고 아무리 뇌까려도 마음 가득한 씁쓸함은 어쩔 수 없는데, 그것이 기도한다고, 성경 본다고, 봉사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 분명해서 양심상 그럴 수도 없는 그 상황, 그 시절의 심령은 정말로 겪지 않고서는 모르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적어도 인생의 곤고함이 교회에 가서 기도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어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어떤 행위를 드린다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산에 가서 소나무 뽑으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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