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8장) 빌닷의 첫 번째 변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14. 13:08 Writer : 김홍덕

주관하시는 하나님 vs. 반응하시는 하나님


욥기는 언급한 바와 같이 엘리후가 나타날 때까지는 세 친구와 욥의 대화가 평행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세 친구는 욥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엄청난 환난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욥은 자신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없다. 또 하나님은 행위로 사람을 의롭다 하시지 않는다. 그런데 죄가 없는 내가 고난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맥락에서 세 친구 중의 세 번째(말한 순서로) 친구인 빌닷이 욥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설득이고 권고 같지만 사실 심판의 성격이 짙습니다. 그리고 이런 심판은 오늘날 교회에도 많습니다. 곤고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한 탓이라고 여기는 것이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 목사와 다투다 병을 얻으면 ‘하나님의 종에게 대들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언젠가 이야기 했듯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니 아들이 종에게 뭐라 한 것으로 병을 얻을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이라도 화를 내고 열을 내면 병을 얻기도 하는 것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욥기 8장에 나오는 빌닷의 말은 한 마디로 <인과응보>입니다. 자식들이 죽은 것도 죄를 지어 벌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욥이 처한 고난은 하나님께서 욥의 죄에 대하여 벌을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법으로 보면 지금부터 하나님께 온전히 행하면 그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나중에는 창대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일원이 새로운 사업장을 열면 교회에서 선물을 준비하는데 그때 가장 많이 선물하는 문구가 바로 욥 8:7절입니다. 액자와 같은 것으로 그렇게 합니다. 생각해보니 저도 받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빌닷이 한 말이라는 것이 참 놀라운 것입니다.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지, 아니면 벌을 주셨는지 판단하는 빌닷이 한 말을 육신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여기기에 사업장이 하나님의 은혜로 번창하기를 바라면서 선물을 한다는 것이 왠지 너무 절묘하기도 합니다. 물론 성경의 모든 말씀은 각 신앙의 단계에서 언제나 온전하게 사용되지만, 이렇게 자기 정체성에 맞는 말씀들만 소위 말하듯 핀셋처럼 사용하는 것도 참 놀라운 것입니다. 성경을 지켜 세상에서 복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반가운 말씀인가 봅니다.


다시 빌닷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정리해 본다면,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분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가치관은 당연히 사람이 하나님께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지를 신앙의 본질로 삼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처한 형편이나 모습은 모두 그 사람이 하나님께 행한 결과에 보응하신 결과라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자기 인생을 또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대할 때는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복을 주시거나 벌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보고 있습니다. 빌닷처럼. 이것은 사람들의 그 말이 거짓이라는 증거이고, 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 분이라는 증거입니다.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그 뜻을 정하시고, 그 뜻 안에서 복이든 벌이든 고난이든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마음대로 행사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이고, 반응하시는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나 오늘날 기독교인 더 나아가서 신을 신앙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진 신에 대한 개념으로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복을 받거나 벌을 받아 고난에 처하게 된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의미입니다. 창조주라면 모든 것이 그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으로서 겪고 인지하는 모든 것이 다 그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계획하시고 주관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닷과 같은 가치관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보이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있다가 그 결과에 따라 반응하신다는 것인데, 그것은 반응 이전에는 어떤 계획이 없다는 것입니다. 잘하면 상주고 못하면 벌준다는 것만 있지, 그 내용에 대한 주관은 아직 미완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론적으로 창조의 미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에 보응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2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파편화해서 하나의 독립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리하면 곤란합니다. 로마서 2장에서도 바울 사도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는 말씀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행위라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이 하는 행동은 그 안에 가진 의가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기의 주요한 주제가 여기에도 녹아 있습니다. 욥이 겪는 고난이 욥의 행위에 대한 결과, 즉 빌닷이 말하고 있는 ‘인과응보’에 해당되는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의 빛으로서 역사하시는 것이냐에 관한 것이냐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욥기도 본다면 세 친구는 하나님은 반응하시는 하나님으로 보고 있고, 욥은 반응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것은 알지만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안목이 부족한 상태로 엘리후의 변론까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관하시는 창조주라는 것은 우리가 겪는 고난이나 심지어 사람이 악으로 여기는 것까지 모두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안목이 없으면 욥기 1,2장에 나오는 사탄과의 대화 같은 것은 이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욥과 같이 인생이 겪는 곤고함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인생이 만족이 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이 만족의 동산인 점을 상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동차를 사서 이동을 할 때 자동차 위주로 살면 바보입니다. 운전자의 안전을 위하여 정비하고, 사용하고 운전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가다가 흙탕물이 있어 차가 더러워질까 하여 돌아가는 것은 정말 바보인 것입니다. 차가 때로 악조건에서도 운행되고, 때로 과속을 하는 것은 차에게는 고난일지 몰라도 그 차를 구매하고 만든 주인의 계획안에 있는 것입니다. 즉 주인의 주관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말 그대로 생사화복에 대한 모든 계획을 가지고 주관하십니다.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목적대로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목적대로 행하시는 것에 순종하여 살면 때로 육신이 육신의 곤고함으로 느끼는 일들을 겪기도 하나, 그 목적 안에서 주관하심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면 때로 곤고한 인생이지만 그 과정조차도 하나님께서 생명의 빛을 비추심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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