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9-10장) 빌닷에 대한 욥의 반론 –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16. 16:54 Writer : 김홍덕

욥의 변론은 계속 이어집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죄한다고 생각합니다.(10:2) 이것은 어떻게 보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죄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불의하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욥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은 죄가 없는데, 자신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정죄하신 모습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사람이 행위로 의로워지려 한다고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앞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듯 하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욥의 변론 속에는 다분히 하나님이 고의로 그러신다는 생각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것이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원망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신 이 육신은 이를 어떻게 보는지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고 본질 중의 본질입니다. 육신을 주신 이유는 인생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인생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인생의 정체성은 존재의 목적이고, 육신은 그 존재의 목적을 나타내는 수단인 것입니다.


그 목적은 인생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육신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용한다는 것은 소비된다는 것이고, 그렇게 소비되고 사용되어진다는 것은 일면 곤고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육신의 곤고함을 겪으며 그것이 힘듭니다. 이 곤고함은 결국 육신의 문제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진 두 가지 큰 관점이 있는데 먼저는 사람이 육신을 자신의 것으로 보기 때문에 평안하지 않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인식하고 이를 바꾸려고 하는 관점이 있고, 다른 한 관점은 인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그 주신 목적대로 사용됨에 있어 순종하는 관점입니다. 그 관점 안에서는 인생이 겪는 일들이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는 여정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 육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육신을 자신의 소유로 보기에 평안한 것이 정상이라고 보는 세 친구에게나,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육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욥에게나 곤고함은 동일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평안해야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육신의 어떠함은 존재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는 과정에서의 현상으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육신이 평안한 것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이 평안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이며, 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평안을 위하여 하나님께 말씀을 지키는 공로를 늘 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에서 사도들이 크게 경계하는 율법주의와 영지주의가 파생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편 욥은 하나님께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지만 인생의 목적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신 이유도 그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욥과의 마지막 대화에서 욥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신 내용을 알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전반적인 행간을 보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는 안목으로 욥기를 보면 결국 세 친구의 안목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어떤 물건을 구입해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어떤 물건을 만들거나 구매하는 것은 그것을 소비하여 자신이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지, 그것을 보존하고 아끼기 위하여 만들고 사지 않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그가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주시고 경영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 육신이 살면서 겪는 일을 어떻게 순종할 것인지도 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대부분 행위를 의로 여기는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흑암이 혼돈하고’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자신의 평안을 담보하여 주는지 늘 어둡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뭘 해도 인생은 늘 수고스럽기 때문입니다. 또 인생을 늘 고난으로 보기에 어떻게 봐도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는 못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행위를 의의 기준으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성경을 지키려고 해 봐도 언제나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모든 행위가 부정함을 하나님께 고백하게 됩니다. 물론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육신이 된 말씀을 만나야 합니다. 즉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단지 존재만 바뀌면 된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롭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마치 온 몸이 문둥병으로 희게 되면 오히려 정하게 되는 것과 같이.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보게 되면 그 때부터는 인생이 새롭게 보입니다. 그런데 세상이나 삶의 형편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짧지 않는 시간 하나님을 아는 귀한 존재인데 삶이 나아지지 않는 것에 힘들어 합니다. 이 시점은 신앙의 여정에서 아주 힘들기도 하고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바로 욥과 같은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행위를 한다고 하나님께서 자기 삶의 형편을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는데 삶이나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 갈등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그 시절에는 정말로 욥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나지 않았다면 나았을 것을…’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의를 아나 모르나 하나님은 동일하게 대하신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외람되나 이 과정은 겪어본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반대로 하나님 앞에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사람, 교회에 가서 육신의 문제를 기도하는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 친구를 보면 알지 못한 사람의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야 육신의 삶이 무고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 서면 늘 죄인이 됩니다. 행위로 의로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행위로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따를 수 없으니 그 가치관 앞에서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다른 의를 가지면 의가 다르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됩니다. 공산주의자가 민주국가 안에 가만히 있어도 죄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세 친구 앞에 있는 욥의 모습이 또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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