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3-14장) 욥의 기도 –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5. 11:48 Writer : 김홍덕

욥의 기도에는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 될 것이라 여기는 욥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지만 삶은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곤고해진 욥에게 있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친구와 달리 온전히 알았음에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가져온 곤고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욥의 생각은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이유를 완전히 알지 못한 세월의 모습입니다. 이건 말 자체로는 참 부족한 단계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욥기 안에서만 봐도 세 친구와는 확연히 다른 안목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진 안목이 세 친구들의 안목과 같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욥이 육신을 주신 목적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허물이라기보다 오히려 큰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그 나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욥에게 이 시험을 허락하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은 사탄과 그냥 장난삼아 욥을 대하신 것에 불과한 것이고, 그렇다면 욥이 하나님께 항변하는 것은 책망 받을 것이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괜히 자신을 곤고하게 하신다고 줄곧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고난을 그치게 해 달라고, 또 이 고난을 인하여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얼굴을 바로 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욥이 말하는 두려움은 하나님께 뭔가를 바라기에 그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행위를 드리려는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얼굴을 바로 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바로 안다는 것은 사실 욥의 고난이 그치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욥이 지금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육신의 평안을 위해서 육신으로 수고하고 힘든 일을 신념으로 감당하여 그 공로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 투자의 결과 자신이 바라는 평안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닌 것은 알겠는데 그것을 안다고 해서 육신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육신으로 겪는 것이 그저 힘들고, 그러다보니 육신의 장막을 벗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욥의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 수많은 동물들의 특성들을 일일이 열거하시면서 욥에게 왜 그런 특성을 가졌는지 아느냐고 물으신 것은 육체를 가진 존재들이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표현된 형식이라는 것을 철저히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이외의 모든 동식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모두 ‘그대로 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대로 표현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육신이란 하나님의 의와 특성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도 존재의 목적으로만 본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으로서 육신을 주셨지만, 특이하게도 사람은 그대로 된 것이 아니라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짐승은 아담이 이름을 붙이면 되었습니다. 동물이나 식물은 그 스스로가 선택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그대로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유일하게 선악과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에서 보면 스스로 무엇을 옳다고 여기고 그것을 취할 수 있는 여지를 두셨습니다. 이는 사람이란 존재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그대로 만들어진 모든 존재들을 보면서, 또 하나님이 주신 사고와 생각과 의지로서 하나님의 정체성과 의와 또 인생을 주신 목적을 생각하게 하시고 그것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을 삶의 의미로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란 존재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그 경영을 보고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를 인식할 수 있게 하시고 그것에 순종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 이외의 존재가 하나님을 알도록 애쓰신다는 말은 없지만 오직 사람은 그 스스로가 하나님의 의를 순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엘리후)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 한없는 한계를 느끼고 육신이 소진되어가는 것을 힘들어하지만 그것이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육신이 그러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가진 생각에서도 그것이 나타나는데, 육신이 평안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이라고 여길 정도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욥은 육신이 평안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육신의 수고를 드려서 육신의 평안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의롭게 여기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육신을 가진 욥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것은 알겠는데 그러면 이 육신이 수고하고, 사람들이 고난이라 여기는 곤고함을 육신에 지니고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 다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욥이 마지막에 회개를 할 때 하나님께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였다.’고 고백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욥의 기도는 그것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이고, 엘리후를 통해서 또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말씀을 통하여 그 기도는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가집니다. 물론 우선은 하나님을 행위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것이 참 문제이긴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고 교회가고 성경 보는 것과 같은 것은 행위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것을 언제까지 얼마나 해야 온전해질 것인지를 의심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런 신앙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나면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찾고서 처음에는 욥이 호사를 누렸듯 기뻤다가 욥의 기도와 같이 이 육신의 존재 목적에 대하여 더 깊이 알기 이전에 ‘하나님은 바로 알았는데 어쩌란 말인가?’라는 의문의 세월을 살게 될 것인데, 그것이 바로 욥이 겪은 고난의 본질이고, 그 고난의 끝에는 말 그대로 정금 같이 되어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온전한 목적으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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