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과의 대화가 고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2회전까지 마쳤지만 서로의 의견을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있습니다. 세 친구와 욥의 대화가 이렇게 고착 상태에 빠진 것은 일면 둘 다 온전하고 확실한 안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후에 엘리후가 말을 할 때에는 욥도, 친구들도 어떤 말도 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그런 중에 엘리바스는 22장에서 욥에 대한 비난의 수위를 한껏 높입니다. 말 그대로 권면이 아니라 비난에 가깝습니다. 욥이 형제의 물건을 압류하고 헐벗은 사람의 옷을 벗기고, 갈한 자에게 물도 주지 않았고,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벌을 받는 것이라고 욥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것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구해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엘리바스의 말에 대하여 욥의 대답은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는데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모르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엘리바스와 욥이 생각하는 계명을 지키는 것의 차이이고, 욥이 말하는 하나님이 계신 곳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의도와 언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의도가 내용이고 언어는 형식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으로서 가진 마음이나 필요가 동일하기 때문에 다른 언어 속에도 우리와 같은 의미의 단어나 문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말이라는 것은 언어가 본질이 아니라 의도가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성경을 보는 것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보면 사람은 누구라도 살면서 ‘항상’이라는 빈도부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 행위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라도. 그런데 성경이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으면 이것은 정말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이 그렇게 항상 어떤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가장 잘 아실 것이고, 생각해보면 그렇게 만드셨는데 그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문자 그대로 지키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심청전을 읽고 바다에 빠져야 효도가 되는 것이 아니듯.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문자 그대로 성경을 지켜보려 합니다. 그것은 사실 성경 말씀이 엄중해서가 아닙니다. 성경을 지켜서 얻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지키지 않으면 그것을 얻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신념으로 성경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세 친구들이 가진 두려움이고, 욥의 기도에서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한 그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더 확장해보면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그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이 두려움은 단지 두려움을 떨치려 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두려움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 아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나타난 예수님을 보면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되기에 그러면 육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행간으로 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의 의도와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때문이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정욕을 벗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청전을 읽고 바다에 빠져야 효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다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엘리바스와 욥이 가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견해의 차이도 그렇습니다. 욥의 형편을 두고 엘리바스는 욥이 가난한 자를 외면한 것과 같이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고, 자기 형편이 아주 나쁜 상황 중에 있는 욥은 자기 형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다고 하는 차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사람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은 문자 그대로 지켜내는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가난한 자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삶의 목적임을 받아 그것이 생명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속심령에서 생명이 되어 있다면 구제할 때 구제하고, 기도할 때 기도하는 생명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은 그 문자 자체나 계명으로 구체화된 행동이나 행위가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계명을 주신 본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목적이 사람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은 그 문자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엘리바스와 욥의 시각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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