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바스의 세 번째 말에서 악인은 반드시 망한다고 말하며 욥의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라 말합니다. 그에 대하여 욥은 오히려 악인들이 평안하니 하나님께서 그 벌하는 때를 정하지 않으신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욥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자신이 알게 된다면 그 앞에서 그것을 호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 친구들과 욥의 대화를 돌아보면 하나님께 무엇을 아뢰는데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를 알아야 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사람의 모든 행사를 다 아시는 분이라는 것은 대화의 배경으로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일을 말하려 하나 어디서 하나님을 발견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욥 23:3-5)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곧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지전능은 기본적인 성품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만나는데 어떤 장소나 자리가 필요하다고 거의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데 욥이 말하는 이 자리는 물리적인 어떤 지점이나 자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숨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와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이미 숨은 아담을 대화할 수 있을 만큼 찾았는데 왜 갑자기 어디에 있는지를 물으셨을까? 그것은 아담이 어느 나무, 어느 숲에 숨었는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정체성, 곧 사람이 하나님이 목적한 본분을 다하고 있느냐는 것을 물으신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 역시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는 어차피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욥이 발견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계신 장소(지점)이 아닙니다. 이는 앞서 욥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원한다고 한 것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엘리바스의 말에 답하면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원한다고 한 것은 악한 자들이 지계(경계)를 자기 유리하게 옮기고 남의 양 떼를 빼앗고, 고아의 나귀를 가져가고, 과부의 소를 저당 잡고 살아도 그 자식까지 먹을 걱정을 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욥은 자신의 길은 하나님이 아시기에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며 오히려 그런 자들이 세상에서 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유명한 말씀을 만납니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자신의 형편이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으로 인함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며, 이 고난은 자신이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자리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나고 나면 자신이 정금 같이 나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길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하는지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욥은 하나님은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인생은 고난이라 여기며 그 고난을 하나님께서 제하여 주시기를 바라면서 성경에 적힌 대로 기도하고, 말씀보고, 전도하면 자신이 세상의 가치로 귀한 사람, 곧 성공하고 평안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 말씀을 받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금이라는 것은 귀한 것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면 그 귀함을 가늠하는 가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이 평안한 것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욥의 세 친구가 그렇고, 사탄이 그렇고, 오늘날 교회에 가서 밥 달라, 돈 달라 기도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합니다. 그 기준에 의한 정금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이 말하는 정금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이 계신 자리를 아는 것, 그리고 왜 이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평안하게 하시는지 하나님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정금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금 같이 귀한 하나님의 정체성은 하나님께서 육신의 행위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욥은 바로 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지금 겪는 고난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될 것이며, 그 끝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정금과 같이 될 것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상태가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고 하나님께 물을 수 있는 자리라고 욥은 생각하고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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