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닷과 소발은 두 번째 대화에서 욥의 말은 자신들을 짐승처럼 여기고 부정하게 여기며 어리석은 자로 여기며 모욕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욥이 그렇게 자신의 상황과 관련하여 분해한다고 해서 땅이 버려지거나 바위가 옮겨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빌닷이 말하기도 합니다. 즉 욥의 말로 자신의 의를 주장한다고 해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욥은 오히려 친구들의 말이 자신을 괴롭게 하고 꾸짖고 학대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자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욥은 행여 자신에게 허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의 문제이지 친구들 너희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대적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대화 속에서 친구들은 욥이 악하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말하는 욥의 악은 욥의 형편으로 보면 분명히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결과로 인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지혜자들의 공통적인 말이며, 자기들의 경험으로 볼 때 확실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욥은 그것은 인정하지 않으니 욥은 악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때로 친구가 자신과 같이 곤고하면 위로할 것이지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양 심판하듯 책망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은 하나님께 죄가 없고 단지 이 상황은 하찮은 자신을 괜히 대적하심을 인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빌닷과 소발의 말과 욥의 말에서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는데, 빌닷과 소발은 악인은 반드시 망한다고 말하고 있는 반면 욥은 악인이 오히려 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의 차이는 <악>이 무엇인지에 대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친구들이 말하는 악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행위, 곧 범죄를 악한 것이라 하고 있고, 욥은 악이란 친구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욥은 ‘악’은 하나님을 행위를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보시는 신으로 보는 안목과 가치관이라는 것입니다. 즉 행위가 어떠했는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아주 첨예한 문제가 되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죄나 악은 윤리적 기준과 사회의 법률적 범주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관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하나님이 의와 선으로 여기시는 것도 행동에 기반을 두고 판단을 합니다. 문제는 행동은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심지어 교파에 따라 달라지기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그 선과 악의 기준이 지극히 사람의 주관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에 “네 죄를 사하였다.”고 하심을 두고 유대인들이 속으로 ‘참담하다.’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악한 생각>이라고 하신 것과 부자 청년이 와서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여!’라고 했을 때 책망하신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만이 선하신 분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각자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의 모든 다툼이 생기고 죄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가진 여러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통일되지 않았다는 것에서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교파가 갈렸다는 그 하나만 보아도 사람들 자기 맘대로 선과 악을 가늠하는 악함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사람이 스스로 가졌다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세상의 윤리와 사회 법률적 프레임 안에서 선과 악을 규정하고 그것을 지키는 행함을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같이 의롭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하려 하는 것이 원론적인 율법 신앙이고 행함으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행하는 동력을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여 힘을 얻어서 하게 되면 그것은 행함이 아니라고 자기 최면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최면을 학문으로 만든 것이 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이 가진 악에 대한 개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생각은 사실 별것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만나는 말들에 용해되어 있습니다. 윤리적으로 지탄받는 사람을 향해서 천벌(天罰)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로 판단하신다는 생각의 가장 대표적인 생각입니다. 그것이 욥의 친구들의 생각이고, 선과 악의 기준이며, 오늘날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가진 신앙의 근간입니다.


친구들은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욥의 상황은 한 마디로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그것이 아니라고 주장을 합니다. 욥은 자신의 행위가 완전무결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시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여기서 ‘그러면 막 살아도 되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다른 글에서 많이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악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서로의 말을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욥과 친구들 각자가 가진 기준으로 악한 사람들의 행사에 대한 견해는 사뭇 다릅니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악하다고 여기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결국은 패망이라고 생각하고 욥에게 말을 합니다. 이는 다분히 욥의 형편이 그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욥은 21장에서 악한 사람들이 오히려 흥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친구들이 말하듯 세상의 윤리나 사회 법률적으로 악한 사람들이 잘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로 보고 판단하신다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잘 된다는 의미라고 봐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로 경험해 본 사람은 어떤 의미인지 확실히 아는 것이기도 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것을 하나님께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힘들게 지키는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서 보면, 그 신앙이 얼마나 마약과 같은 것이고 덧없는 것인지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서 성공하고서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고, 그것을 은혜라 여기며 설교와 간증을 하면서 모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추종하며 매몰되는 것을 보는 것도 놀라운데 그것이 별다른 저항 없이 세상에서 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정말로 괴로운 일입니다. 욥이 괴롭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욥의 딜레마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나님의 정체성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살피시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온전히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박탈감을 준다고 욥은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욥의 이 한탄들을 알려면 적어도 욥과 같이 하나님이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 하나님은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것, 성경대로 기도하고 봉사한다고 의롭게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은 알아야 알 수 있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그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것이 온전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얼마가지 않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알기까지의 시간은 욥이 한탄하듯 괴로운 시절이고 엘리후의 말처럼 죄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경영을 온전히 알게 되는 과정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욥이 가진 안목에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의 정체성은 존재의 하나님으로 보면서 정작 그 가치는 세상의 가치를 척도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그 안목의 가치 척도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세상에서 형통하는 것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정체성을 온전히 알아간다는 것은 정말로 놀랍고 세상에 비길 것 없는 존귀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귀함을 아는 만큼 세상의 사람들이 그것을 귀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 비길 것 없는 그 귀한 하나님의 의가 세상의 가치로 보잘 것 없고 오히려 종과 죄인이 되는 것이라는 놀라운 반전이 있는 것입니다.


그 반전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세상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그 하나님의 성품과 그 품속에 있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삶이 무엇인지 보이시는 천하보다 귀한 것을 보이셨는데, 놀랍게도 그 귀함의 실체는 다름 아닌 세상의 가치로 죄인이 되고 종이 되고 천한 자리로 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경영과 의를 알지 못하기에 한탄하는 것입니다.


이 반전은 사실 말이 쉽지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신앙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귀함이 바로 종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사수하기 위한 여정일지 모릅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자기 앞에 펼쳐진 것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욥이 악인이 형통하다고 한 그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마당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경영이고 사람을 향한 의(목적)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