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25-26장) 빌닷과의 세 번째 대화 –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16. 16:50 Writer : 김홍덕

빌닷의 세 번째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람이 아무리 노력한들 하나님과 같이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욥은 “그런 소리를 누구에서 들은 것이냐?‘라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의로워질 수 없다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를 무력화 시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것과 같이 제자들과 예수님을 믿는 이들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세 친구들과 같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이 노력해도 의로워질 수 없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헛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이 불의한 존재가 되거나.


문제는 욥기 안에 있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오늘날 신앙인들도 한 치의 오차 없이 빌닷의 생각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단지 노력할 뿐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 노력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가 생기고 그것을 연구하는 신학이라는 학문이 생기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 생각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보여주신 것조차 보여주신 행동과 말 그대로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아질 수 없고, 의로워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는 물 위를 걸을 수 없고, 병자를 맘대로 고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죽은 자를 살릴 수 없음을 인함입니다.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 예수님과 같이 의로워지는 것은 예수님이 보이신 기적을 따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성경의 행간과 의도를 모르고 문장 그대로를 지키려는 생각이나, 예수님의 기적을 따라 해야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들이 금식하게하고, 정신 나간 것들이 치유의 은사 운운하면서 산에서 기도해주면서 돈 받아먹는 짓을 하게하며, 송구영신 예배 때 새 점치듯 성경구절 뽑기를 하게하며, 그것을 인하여 헌금하게 하는 짓거리들을 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그런 무식한 짓들을 하는 이유가 자신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있기에 그것을 이루고자 자기 육신이 동의하지 않는데, 때로는 가족이 걱정하는데도 그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명이라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 번만 생각해보면 그 모습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이 보일지도 모르는데 생명이 없고 어두운지라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초식동물이 필연적으로 풀을 먹게 되듯 그 의롭지 못함을 인하여 자기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하여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는 율법적인 신앙이 빠지게 되거나, 아니면 행동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영지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욥기를 쓰면서 많이 강조하는 것이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이 율법적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기도하라고 하시니 기도하고, 기뻐하라 하니 기쁨과 웃음을 연습까지 하면서 시늉을 내고, 감사하라고 하니 화가 나는 순간에도 억지로 감사할 명분을 찾아 마음이야 어떻든 말로 감사한 척 하는 노력들을 하면서 기도하라는 것이나 감사하라는 것이 신약에 또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이기 때문에 율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정말로 무식하고 무지한 생각입니다.


그것은 율법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 것입니다. 계대결혼을 가지고 와서 부활을 논한 사두개인들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성경을 모른다고 하신 것과 같이 오늘날 신약성경에 혹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지키려는 삶을 말씀대로 사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도 율법도 하나님도 인생의 의미도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문장 자체가 아닙니다. 어떤 시대, 어떤 사람의 말이냐에 따라 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계명, 복음이라 여기는 어떤 것이라도 그것을 해야 어떤 반대급부가 있어 행하거나 행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이 율법입니다. 행위가 있어야 무엇이 일어난다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그 결과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변호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그 말입니다.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말도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행위는 존재가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면 그 존재 정체성에 맞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존재는 존재하시게 하시는 이가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기 인생이 존재하기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존재하게 하신 이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된 것도 아니고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을 때 사람을 조성하신 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여겼는지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다는 것을 알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고백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인즉 사람은 부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과 같이 의롭고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을 위하여 보시기에 좋게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빌닷도, 오늘날 사람은 노력할 뿐 의롭지 않다고 생각하고 주장하고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도, 그래서 성경의 어떤 부분이라도 몸으로 지켜내려는 사람도, 아니면 지킬 것을 아예 포기한 사람도 모두 사람을 의롭지 못한 존재로 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은혜가 부족해서 사람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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