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7-31장) 욥의 마지막 변론 –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18. 08:52 Writer : 김홍덕

지혜와 명철


욥과 친구들의 대화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혜의 논쟁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분명하고 잘 알고 있는지를 다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과의 마지막 대화에서 <지혜와 명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이치를 아는 것이고, 명철은 그 분명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는 누가 하나님에 대하여 더 분명하게 알고 있는지에 대한 논쟁입니다. 친구들은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가지고 하나님을 논하고 있고, 욥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논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은 욥의 몰골을 보니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라는 바탕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보고 복과 벌을 주신다고 일반화하고 이것을 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욥은 하나님을 기준으로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 안에 들어오시기 위하여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면 그것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모든 삶은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대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또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행함에 관한 것입니다. 욥은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 말이 잠언에 나오는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말씀입니다.


욥은 28장에서 사람들이 귀하다고 여기는 것들의 가치를 먼저 이야기 합니다. 금이나 보석은 사람들이 엄청난 수고를 해야 얻을 수 있는 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얻기 위한 수고로 하나님의 지혜는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행함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혜를 상황의 판단과 결정의 현명함으로 이해합니다. 그 자체는 틀린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이 육신의 평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평안하게 하는 것일수록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는 결국 어떤 수고를 하는지를 결정하는 선택을 잘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전지전능하시니 자신이 바라는 것에 대한 모범적인 해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를 기도하고 결정하는 것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그것을 더 잘하기 위하여 공부하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란 이름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나 소나 다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의는 그 만드신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또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살게 하신 뜻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반면에 욥의 친구들과 사람들은 자기가 바라는 육신의 평안을 얻으려면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 더 많고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인지를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어떤 것을, 무엇을 드려야 하는지를 아는 것을 지혜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목사를 찾아가서 묻고, 산에 있는 기도원에 안수 받으러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왼나사를 어떻게 오른쪽으로 넣을 수 있을까를 연구하고, 그 법에 대하여 알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왼나사를 오른쪽으로 돌려 넣는 법을 십년, 아니 백년을 연구한 박사라고 해도 오른쪽으로 돌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관습으로 했을 때 되지 않으니 반대로 돌리는 어린아이보다 나사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공로나 소유의 얼마를 드리느냐에 반응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이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이 알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관심사와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어떤 존재로서 만나려고 하는지에 관심이 있는데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면 내가 원하는 금도끼 은도끼를 주시는지를 고민하고 그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살게 하신 이유입니다. 또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우리를 살게 하신 이유입니다. 그 세상에 많은 일들이 있고, 또 천하 만물이 사람에게 인식되고 영향을 주고받게 하신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를 지으시고 살게 하신 목적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두운 방에 빛이 없어서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목적대로 사용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부딪혀서 다치는 것과 같이 세상을 살다가, 빛이 들어오면 방에 놓은 모든 물건들을 그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왜 이러냐?’ 묻고 반문하던 그 모든 것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의문과 고난과 이치를 모두 알게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지혜와 명철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인생을 주신 목적을 아는 것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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