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7-31장) 욥의 마지막 변론 –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19. 18:34 Writer : 김홍덕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지혜와 명철을 설명하는 욥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없어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욥기를 고난을 이기면 복이 온다는 말씀으로만 압니다. 그것은 인생을 고난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욥기는 그리 단순한 책이 아닙니다.


의인이며, 친구들에게 지혜와 명철이 무엇인지 설교를 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사람인데 갑자기 상상도 안 되는 고난에 빠지게 되고, 그것을 본 친구들은 욥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라고 훈계를 가장한 책망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욥기는 그냥 말 그대로 소설일 뿐입니다.


마치 영화 스포일러를 알고 있듯 무심히 예수님 오신 다음 세대를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또 욥기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과는 반대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연구하는 신학이 정의한 대로 욥기를 정의내리면서 하나님이 주신 삶을 곤고한 것이라 여기는 자신의 그릇된 인생관으로 욥기를 채색하여 이 육신의 곤고함이 끝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으로 욥기를 매조지하려는 것은 아주 어두운 것입니다.


왜 멀쩡히 하나님을 정성껏 섬기고 있는 욥을 성경을 대하는 모든 사람이 꺼려하는 사탄의 요구에 따라 시험을 받게 넘겨주었는지, 또 욥은 자신이 의롭다고 하면서 왜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기를 바라고 있는지, 그리고 세 친구들의 말이 일면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인 것 같아서 액자로 벽에 걸어 놓기까지 하는 말인데 그것을 왜 욥은 수긍하지 않는지, 이런 것이 궁금하지 않다면 단지 욥기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표현이 다소 상이하고, 또 상이한 만큼 의미하는 바가 좀 다를 수는 있지만 욥의 마지막 변론은 하나님께서 행위로 의로워지려하지 않는 자들이 한 시절 겪는 곤고함에 대하여 마무리하듯 정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욥의 죄악이 아니라 무지에 관한 것입니다. 엘리후가 욥을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행위로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시절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욥을 역사적 신학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그 많은 말들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자신이 의롭다는 그 관점에서 이 고난을 볼 수 있는 영적 단계가 아니라면 이 욥기는 완전히 딴나라 소설입니다. 물론 문자만 놓고 보면 고난을 참고 이기면 복이 온다가 되겠지만 그것은 북한이 인민 민주주의라며 민주주의를 인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의롭다는 주장을 단 한 번도 굽힌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엘리후도 그것에 대하여 별 언급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이 의롭다는 욥의 말이 문제가 아니라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있는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쟁론하는 것이 엘리후와 하나님의 관심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또 욥과 같이 고난을 견뎌서 복을 받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엘리후와 하나님이 관심을 가진 욥의 심정을 알아야 할 것이고, 적어도 그것을 알려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확신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확신이 없다는 욥의 마음을 알 수 없고, 욥의 왜 그런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으며, 엘리후와 하나님께서 왜 욥에게 책망을 하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도 욥의 친구들과 같이 자신에게 어떤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반사적으로 ‘내가 하나님께 뭘 잘못했지?’를 돌아봅니다. 즉 적어도 그 순간 자신이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어떤 <행위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자신의 신앙관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신앙은 결국 율법주의 신앙이거나 영지주의적인 신앙이 됩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듯 그 출발이 인생이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것이므로 어떻게든 의로운 하나님과 수준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무엇이라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마음과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듯이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지켜내려 노력하고, 어떤 이들은 그런 시도들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경험적 확신을 가지고 육신은 하나님의 관심이 아니라는 영지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항변하고 자신이 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의로워지려는 시도가 실패서도 아니고, 행위로 큰 죄를 지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욥이 겪는 고난과 의문과 갈등은 하나님은 사람을 행위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데도 육신의 삶은 여상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의 마음과 욥의 말과 욥의 항변과 욥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과 엘리후의 책망이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려면 적어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이 아니며,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롭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확신은 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도하면 의로워지고 바라는 것을 들어주시니 기도하자는 것이나 성경을 보고 봉사를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과 같은 생각들도 모두 하나님 앞에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어쩌면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욥기가 단지 고난을 이기면 복을 받는다는 말씀으로 각인되고 있는 것은 그런 빈틈을 인함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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