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7-31장) 욥의 마지막 변론 – 5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21. 06:58 Writer : 김홍덕

우리는 때로 신을 원망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것은 영화나 드라마는 물론이고 실제 삶 속에서도 그런 사람이나 상황을 보기도 합니다. 그 원망들은 간절한 것 같지만 그 내용은 ‘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혹은 신에게 할 만큼 했고, 세상 착하게 살았는데 왜 들어주지 않느냐는 원망입니다.


그런데 그 원망의 언어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람이 행위를 드리면 하나님은 반응한다는 설정이 깔려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행위로 섬기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행위로 판단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까지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원망은 이것과는 다릅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데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망하게 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보니 그것은 자신을 의롭게 여기기에 온전하고 또 너무 귀한데 육신에게는 엄청난 고난으로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욥기의 시작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에서 욥의 고난이 촉발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상황의 설명이고 본질은 욥의 의로움에서 고난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의롭게 여기시니 육신의 평안과 안녕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게 여긴 결과라고 믿는 가치관이 그것을 한 번 시험해 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 시험을 생각해보는 가치관이 바로 사탄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욥이 괜한 것 같은 고난을 얼마나 잘 견디고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신뢰하는지를 시험하고 그 결과 큰 복을 주신다는 설정 하에 당한 고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아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교회에서는 눈치도 챌 수 없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은 사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세상살이가 힘든데 그 와중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믿으면 세상에서 평안과 성공의 복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욥의 고난을 보는 사람들은 힘든 세상살이를 욥의 고난에 빗대고 싶겠지만 그건 정말로 ‘니 생각’이라 말과 같이 그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게 뭐 신학을 통해서 나왔다고 해도 착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욥이 겪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자신의 의가 된 사람들이 세상을 수용하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욥의 고난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확신은 있어야 한다고 길게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세상에서 전혀 귀한 것으로 여김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어린 사람들마저 와서 그것을 비난하는 그런 것임을 알고서 살아가는 심령의 곤고함이 욥이 겪는 고난인데 하나님께서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모르고 그것을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욥은 겪는 고난은 어쩌면 자신의 자녀들이 행여 죄를 범할까하여 열심히 제사를 드리던 신앙생활을 해 보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 여기시지 않더라는 것을 고난을 통해서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제사나 예배와 같이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을 고난을 당하면서 알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욥이 친구들의 맹렬한 책망에도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자신이 행위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음에도 고난을 당한 자신을 보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욥기와 로마서와 같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자기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안목으로 삶을 살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겪는 혼란은 정말로 상상 이상입니다. 그런 혼란의 경험이 없다면 그저 세상살이가 힘든 것을 자기 맘대로 그 고난에 빗대는 것은 자유지만 욥의 고난은 알 수 없습니다.


그 혼란은 욥이 졸지에 당한 고난에 비할 만큼 당황스럽고 견디기 힘든 과정입니다. 바울 사도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광야에 머물렀던 시절도 그와 같았을 것이고, 베드로 사도가 빌라도의 뜰에서 매 맞는 예수님을 보던 심정에서부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을 때 대답하고는 마음 그리고 그럼에도 엠마오로 달아나고 싶었던 심정의 바탕이 그랬을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인생의 본질로 믿는 사람에게 이것은 전 재산을 잃는 것이나 자녀를 졸지에 잃는 것이나 육신의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님을 욥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육신의 인생살이 세상살이가 곤고하고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아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겪는 자기 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겪는 욕심이 낳은 고난을 여기에 비할 것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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