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1-37장) 엘리후의 책망 –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23. 10:05 Writer : 김홍덕

우리는 쉽게 욥기라는 책을 1-2장에 나오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로 인하여 괜히 큰 고난을 받게 된 욥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에 자기 마음 같이 되지 않는 모든 인생의 갈등과 곤고함이 욥이 겪는 고난인양 생각합니다. 그리고서 욥기의 마지막에 욥의 모든 것이 회복되고 몇 배의 복을 받음과 같이 자신도 이 인생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지만 성경대로 살면 욥과 같이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욥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계속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인생을 고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삶이 육신의 평안을 바라는 육신의 정욕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을 반전시키기 위하여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가치를 몸소 실행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자 합니다.


그리고 자기 육신이 바라는 것에는 반하지만 성경을 지키려는 그 과정을 고난이라 맘대로 정의하고 그렇게 잘 견디면 욥이 받은 곱절의 복과 같이 자신들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욥기의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욥기의 주제는 절대로 그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존재 정체성이 행위를 의롭게 여기시는 신이 아닙니다. 육신의 공로나 소유의 드림을 의롭게 여기시지 않는 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그 이름에서부터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냥 존재하는 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술을 관장하거나, 농사의 풍요를 관장하는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삶의 풍요를 얻으려면 하나님께 소유를 아까워하지 말고 드려야 한다거나, 공로를 드리면 될 것이라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사가 아니라 장사고 거래입니다. 사람들은 그 거래의 일환으로 성경을 지키고, 그 반대급부로 육신의 정욕을 채우려 합니다. 그 사이에 괴리를 메우는 과정이 고난의 과정이고, 욥기는 그것을 말씀하시는 책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욥기의 본론은 어쩌면 엘리후의 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물론 그 사이에 욥이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면서 한 편으로는 자신의 곤고함을 벗기 위하여 오히려 죽는 것이 좋겠다고 한탄하는 한탄이 주제의 단초입니다. 그 단초에서 시작해서 엘리후의 책망에 가까운 말이 있고, 이어서 하나님의 엄청난 질문 공세를 받은 욥이 자신의 모든 한탄과 말이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하는 모습 이면에 깔린 복선이 바로 욥기의 본질이고 주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욥기는 신학적으로나 앞서서 아주 많이 언급한 것과 같이 육신이 바라는 것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을 고난으로 여기고 이것을 이기기 위하여 성경을 육신으로 지켜내면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해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책입니다.


따라서 앞선 글들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욥기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알려면 적어도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그 의로움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하고, 더 나아가서 욥의 원망이 육신의 고난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데도 달라지지 않는 삶에 대한 고찰에 있다는 것을 아는 자리에는 이르러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기를 읽는데 욥의 그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신앙이 아직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가장 은혜로운 것입니다.


물론 욥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의롭지만 하나님의 정체성을 그렇게 바로 알고 있음에도 자신에게는 어떤 귀함도 주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의문으로 곤고함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는 이 욥기는 엄청난 소망을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엄청난 반전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자신은 너무 곤고한 상황인데 이 상황에서 누가 건져줄지 모르겠다고 하는 한탄이 갑자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왜 그렇게 갑자기 그렇게 바뀌었는지 신학자건 목사건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모릅니다.


욥이 단지 질문 공세와 엘리후의 책망을 들었을 뿐인데 회개하게 되었는지, 또 그리고 그것이 곱절의 복으로 이어졌는지의 속뜻도 바울 사도의 반전 고백과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곤고함과 욥의 곤고함이 궤를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을 소유의 드림과 육신의 공로를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알다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의와 내용이며 우리는 그의 형식이요 그릇이요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의 과정을 욥기가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안다는 것이 너무 귀한 것이라서 그것을 알면 세상 귀한 존재가 되거나 아니면 정말 존귀함 속에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리스도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욥이나 제자들이 세상의 방식과 세상의 권력으로 귀해지고 부자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돈이 아닌 말씀으로 사람들에게서 권세를 부여 받고, 돈이나 의술이 아닌 능력으로 병자를 치료하고, 사람의 군대가 아닌 하늘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독립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행위로 섬기다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지혜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라는 것이 세상 초라하게 사형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욥도 하나님을 바로 알았는데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엄청난 곤고함뿐이었기 때문에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욥은 의를 주장함과 동시에 원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애초에 사탄에게 시험에 욥을 내어주신 이유가 바로 그 이유를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이 엘리후의 책망에서 또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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