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7-31장) 욥의 마지막 변론 – 6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22. 06:30 Writer : 김홍덕

욥의 고난과 원망 그리고 마지막의 깨달음은 사람들이 쉽게 체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에 진입장벽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의미는 모르면서 쉽게 자신이 이해했다거나 또 겪은 일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육신이 바라는 바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고생한 것을 욥의 고난에 비교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욥은 처음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에서부터 분명하게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은 정의롭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부합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에 부합되어 나타난 것은 주로 사람들의 눈에 정의롭게, 또 선한 행실로 보이기도 하지만 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는 죽어야 할 사람으로 보였듯 사람들이 볼 때는 악한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정체성에 부합된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의로운 것은 민주주의를 의의 뿌리로 하는 나라의 정체성에 부합된 것인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성경에서 의롭다는 것은 존재의 신이신(신이라고는 하나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의에 부합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욥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의에 부합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욥은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 행위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평안을 누렸는데, 사탄이 볼 때는 반대로 욥의 평안하니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탄의 생각은 욥이 평안하고 부유하니 하나님 앞에 행위로 죄를 범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사람들이 먹고살기 평안하면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평안할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육신이 먹고 사는 것이 평안해지는 것을 바라는 육신의 정욕이 바라는 소망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라며 그것을 바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덤에 회칠한 것에 불과하고 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기만당하지 않는다고 늘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욥이 그런 의로움을 가졌는데 왜 고난을 당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이 얼마간은 엄청 평안하고 놀랍고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을 느끼는 세월을 보내지만 육신의 삶이 지속되면서 그 존귀함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이 아는 것과 달리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엄청난 존귀함인데 그 존귀함이 세상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답답함에서부터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의가 자신에게 열렸는데 그러면 이제부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확실히 밝아지기까지 이전에 하나님께 행위를 드리면 보응이 온다는 어두움에 속한 생각과는 다른 나름의 흐릿함과 같은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마음속에는 이 귀한 하나님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은데 정작 현실은 먹고 사는 문제에 매여 있어서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바라던 시절에 성공하기 바라며 다투던 그 세상 가치의 기초에 세워진 삶의 구조는 여상하여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는 세월이 있다는 것입니다. 욥이 겪는 고난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안다고 삶이 바뀌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여전히 행위의 결과가 육신의 먹거리와 또 도덕이나 선함에 대한 삶의 가치의 기준이 되는 것은 여전함을 알게 되는 시점부터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알게 된 삶이 가진 가치에 대하여 온전히 알게 될 때까지는 쉽게 이야기해서 ‘이렇게 귀한 것이 있는데 삶은 귀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깊은 고민과 탄식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러 가실 때 제자들이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세상에서도 왕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에게 잡혀갈 때 그 놀라운 기적은 버려두고 잡혀가시니 제자들이 다 도망 가버렸고, 빌라도의 뜰에서 채찍질 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베드로에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었던 것이었던 것과 욥의 고난은 비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모습에서 욥의 고난과 원망은 얼마든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엠마오로 도망을 가고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그들의 심정은 정말로 복잡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재방송처럼 예수님 제자들의 모습을 성경에서 읽으니 제자들의 모습이나 행동과 생각이 때로 이해되지 않기도 하지만 스포일러 없이 지금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제자들이 겪는 당황스러움은 아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3년 동안 따라 다니면서 듣고 본 것은 너무 놀랍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었는데,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도 하였는데, 또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외치기도 했는데, 그렇게 귀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당연히 세상에서도 그 존귀함에 합당한 귀한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일 텐데 난데없이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시고 정말 그렇게 되신 예수님의 모습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꿈속의 상상에서도 해 본적 없는 상황이 현실이 된 상황은 욥이 자녀와 재산을 다 잃어버린 것과 같은 상실과 고난이었을 것입니다.


이 당황스러움, 어떻게 보면 경험해보지 막막함은 정말로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본심을 알았는데 그것이 세상에서 귀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크게 당황스러움과 상실은 분명히 욥이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은 고난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이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지 않는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정말로 인생의 본질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놀라운 뜻과 계획이었고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임을 알게 되었는데 그 기쁨도 욥의 10명의 자녀와 풍족한 재산으로 평안을 누린 세월 같이 너무 기뻤는데 이상하게 그 가치가 세상에서는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고 오히려 친구들이 욥을 비난하듯, “그것은 예수 잘 못 믿는 것이야!”라며 비난하는 비난에 직면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겪은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세상 귀한 것을 알았는데 그것이 이상하게 세상에서 가장 천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자신의 운명임에 순종해 가는 갈등의 과정을 겪고 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것이 인생에게 생명의 빛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욥을 통해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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