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1-37장) 엘리후의 책망 – 8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4. 3. 00:00 Writer : 김홍덕

엘리후의 책망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께서 욥이 알기를 바라시는 것은 고난의 해결 방법이 아닙니다. 세 친구들과 같이 회개하여 해결하는 것은 물론 아니고, 욥과 같이 자신이 죽으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 함께하는 일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어떻게 인식하든,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든 아니면 범죄의 결과로 인한 형벌로 이해하든 인생이 늙어가고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힘듭니다.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 세금도 내야했고, 배도 고팠으며 성경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화장실도 다녀야 했으며 씻기도 해야 했습니다. 육신을 가진 이상 그런 것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육신을 가졌다는 것은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 육신으로 하나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이셨다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도 힘겨워하는 그 육신이 바로 하나님이 목적하신 아들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너무나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온전하지 못하게 여기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그 육신을 가진 사람뿐입니다. 


사람이 육신이기에 벗어날 수 없는 것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육신이라는 것을 사용하면 할수록 손이라도 한 번 더 씻어야 하는데, 흔히 이야기하듯 손에 물도 묻히지 않고 사는 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보듯 육신을 사용하지 않고서 원하는 것을 하나라도 더 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또 복으로 또 은혜로 여기는 것은 육신이기에 해야만 하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부정한 마음은 육신이기에 겪는 일들을 고난으로 여깁니다. 병드는 것, 늙어 가는 것, 인생이기에 실수하고 실패하여 힘들어지는 것, 세상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과 같은 것은 인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고, 누구라도 그런 자리에 있기 마련인데 단지 자신이 그것에 처하면 안 되고, 그렇게 자신이 처하면 안 되는 자리기에 그렇게 된다는 것은 불행이며 죄악의 결과라고 단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반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렇게 사람들이 불행이며 고난이며 죄악이며 고난이며 형벌이라고 여기는 것의 상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십자가 사건 하나의 퍼포먼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육신이라는 것이 겪는 모든 수고와 소비에 대한 정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수고와 소비와 정죄되는 것과 불의한 존재가 되어 육신이 소비되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고 그 십자가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하여 보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필연적으로 겪는 병들고 늙고 힘겨운 삶의 여정은 필연적인 것인데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볼 것이냐 아니면 인간의 온전하지 못함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에 따라서 인생이 고난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삶을 주신 그 자체가 감사요 은혜요 영광이냐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인생인 늘 고난이라고 말하면서 생일을 축하합니다. 고난인 삶으로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식적인 관점으로 봐도 의당 모순입니다. 한 가지 여지가 있다면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과 다른 달음박질을 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을 축하한다는 것 정도가 되겠지만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의에는 반하는 것입니다. 생일을 축하하고 인생 자체를 감사함으로 여기든지 아니면 인생을 고난으로 여기든지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옳은 것입니다. 차든지 덥든지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육신을 가진 존재들이 자기 입장에서 겪는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께(때로는 각자의 신께)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한 것과, 하라는 것을 하지 않은 죄를 범한 결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욥과 같이 하나님을 온전히 알면 그것이 없어질 것으로 여기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이유를 모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욥기도 어디까지나 성경 안에 있는 책이고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과 의미를 말씀하시는 책인데 욥기만 난데없이 우리 육신을 괜히 시험해 보고 잘 견디면 복을 주신다는 말씀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욥이 겪는 고난과 갈등 그리고 그로 인한 하나님에 대한 원망에 대한 책망과 같은 내용들은 인생이 육신이 살면서 겪는 곤고함, 모두가 벗고 평안해지고하는 그것을 고난으로 보느냐 아니면 하나님 창조의 목적과 섭리와 경영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답을 유도하고 계신 말씀인 것입니다.


인생이란 말 그대로 전지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 의를 표현할 형식으로 육신을 주시고 그 육신의 소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기 운명으로 알고 사는 사람에게는 모든 인생들이 그렇게 벗고 싶어 하는 육신의 소비가 영광스럽고 감사한 것이라는 것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욥기뿐 아니라 모든 성경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람들은 곤고함으로 일관된 삶에 대한 견해를 벗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육신을 소비재로 창조하셨고 그 육신이 소비되고 연약해지고 힘겨운 삶을 사는 것이 복이요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을 괴변으로 알아듣거나 문자 그대로 들어서 육신을 오히려 자신이 괴롭게 하고 제어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쉽게 벗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욥이 자식과 온 재산을 잃고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 그것을 설명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몸소 그 육신을 소비하는 것을 보이면서까지 말씀하셨는데도 엉뚱하게 예수님께 육신의 평안을 구하고 기도하는 어두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것은 사람으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은 모든 사람은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육신이 소비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아는 것은 절대적으로 성령의 잉태하심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인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엘리후의 책망은 일면 성령의 역할이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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