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욥이 보여주는 대화의 기술


엘리후의 말이 끝나자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욥기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신 본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욥이 하나님께 항변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욥이 고난이 겪는 이유에 대한 것이며, 그렇다는 것은 사탄에게 욥을 내어주시므로 고난을 겪은 이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뭔가를 조목조목 설명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답할 수 없는 것을 연이어 질문하시는 것뿐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질문에 대하여 욥은 하나도 답하지 못하였는데 욥은 깨달았고, 회개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심한 복선과 암구호가 오간 상황 같으나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욥이 알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라 질문하신 의도를 알기 바라셨고, 욥은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욥의 대화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한 분명한 가이드를 제시해 줍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항상 기뻐하라.’고 하시니 어찌되었든 기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기뻐하려고 해 보면 육신을 가진 인생들은 화가 나는 일들이 많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 뿐인 것 같고, 슬픈 일도 태반입니다. 그렇지만 기뻐하라고 했으니 억지로 기뻐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기쁨으로 승화시킬 탈출구를 찾기에 골몰합니다.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그렇게 생각하고 지키려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키는 것이 정답이라면 욥은 하나님의 질문에 조목조목 대답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질문이니 그것에 답을 하여야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대우하는 것일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대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답을 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욥이 알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질문하신 의(도)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문장 그대로 지키기만을 하나님이 바라시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하셔서 도전해보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항상 기뻐할 수 없더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지키기 힘든 것을 지키라고 하셨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이지 지킬 방법과 수단과 요령을 궁리할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궁리한다고 신학이란 학문까지 만들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의 육신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 만드신 육신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도 주셨고 경영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우리 육신을 가진 인생들이 순간순간 어떤 일이 있어도 기뻐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사람이 지키기 힘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욥이 하나님의 질문들에 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질문하시는 의도를 알았던 것과 같은 마음으로 성경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완전히 문장 그대로 지키려고 합니다. 교파가 갈라지는 것도, 성경을 경전으로 하는 종교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분파되는 것도 심지어 세례를 세례라고 해야 하는지 침례라고 해야 하는지를 다투는 것도 모자라 성경은 특정한 것을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모든 것들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사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로 욥기를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예식은 이렇게 해야 한다(have to)고 가르치고 배우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욥기와 같은 성경을 가르칠 방법도 의미도 모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마저도 태연하게 가르치고 있는 진정한 회칠한 무덤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고,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것에 권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욥의 대화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질문하시고 욥은 하나도 답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세례라고 해야 하는지 침례라고 해야 하는지에 따라 종파가 갈려져도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모르는 사람들의 신앙관으로 보면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기껏해야 성경에서 “하나님이 만든 동물 중에 최고라고 한 것이 뭔지 아냐?”라는 질문과 답을 주고받는 정도일 뿐.


성경은 행간을 읽는 것입니다. 세례가 맞는지 침례가 맞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절이 언제인지 성탄절이 언제인지를 따지는 것도 아닙니다. 노아의 방주나 바벨탑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아닌지를 따지고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청전을 읽고 어떻게 바다에 빠지고 바다 어디에 빠져야 효도를 하는 것이냐를 다투는 어리석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욥에게 질문하시는 하나님은 욥이 그것을 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신 것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 것도 상황에 무관하게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 사람이 어떤 존재로 나갈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욥에게 하신 질문들은 욥이 알지 못했던 것, 곧 하나님께서 인생을 경영하심에 있어 인생이 고난으로 느끼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경영하시는 것으로 인한 것이라는 뜻을 가지셨다는 것이고,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 것은 존재 자체가 기쁜 존재가 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하시고 욥이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음에도 오히려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하신 의도를 욥이 알았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답을 구한 것이 아니라 질문하신 의도를 알기 바라신 마음에 합하는 것이기에 욥의 깨달음과 회개에 기뻐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모습의 교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성경을 대하는 안목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안목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목적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안목은 생명의 것이고, 하나님의 목적을 안다는 것이 목적 안에서 생명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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