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1-37장) 엘리후의 책망 – 7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31. 12:50 Writer : 김홍덕

고난에 대한 올바른 정의


욥기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고난의 올바른 정의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난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난의 원인은 사람이 죄를 범하였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단련하시기 위해서 괜히 고난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범한 것을 인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세 친구들의 생각이고, 괜히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욥의 생각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인생에서의 고난에 대하여 가진 개념을 종합적으로 두 가지로 욥기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그 고난에 대한 생각들은 모두 하나님이 인생을 경영하시는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엘리후를 통해서 또 하나님의 질문들 통해서 알게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욥기가 말씀하시는 고난의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견디면 그 고난의 반대급부가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육신의 병마를 싸워 이기면 건강한 삶을 주신다고 믿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을 때 하나님을 믿으면 경제적인 풍요로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난은 남들처럼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을 감수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그 형태가 어떠하든 자신들이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위하여 견뎌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잘못된 행동을 인함이라는 것을 깨닫고 잘못된 행동을 하면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학습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그 학습의 목적은 당연히 자신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인가를 학습하는 것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자위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의 변호가 필요한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들었다면 그것은 단지 괴변일 뿐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가진 고난의 정의는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결과이거나 하나님께서 더 큰 육신의 복을 주시기 위하여 자격을 검증하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난은 오직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극복해야 할 관문이고, 테스트며 육신의 복에 합당한 행위로 정결해지는 회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복을 얻는 자격에 관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단지 투자 목적일 뿐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감사함이나 인생의 의미와 무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인하고 싶겠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고 복을 주시는 것은 육신을 보존하시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람은 쇠약해지거나 늙거나 죽거나 병들지 않게 만드셨을 것입니다. 피조물은 어디까지나 창조주의 목적에 귀속된 존재이지 창조주가 피조물의 보존을 위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에 눈이 어두워져서 육신이 늙고 또 죽어가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주목하지도 않고 왜 그런지에 대하여 생각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으니 육신의 곤고함, 즉 고난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의 본질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을 보존하시려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시고자 창조하시고 인생을 주신 것입니다. 사용하신다는 것은 당연히 소비가 된다는 것이고,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렇듯 소비는 보존이 아니라 닳고 약해지며 없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 일련의 모든 과정들이 바로 고난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 치명적인 모욕 같지만 피조물의 자리를 잘 지키는 것이 오히려 피조물의 가장 큰 영광이라는 것을 안다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하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사람들이 자신들 만의 선과 악으로 세상과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지극히 자신의 가치를 부여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것 이전에 사람이 피조물이라는 정체성을 망각하고 스스로 자기 삶에 특히 육신의 평안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선악과를 보기 좋고 먹기 좋은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면서 겪는 고난은 기본적으로 죄를 인함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육신의 평안이라는 당근을 주시기 위한 채찍질도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일상적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람을 경영하시므로 인생이 소비되는 과정에 수반된 열화(약해지는 것)인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인생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음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기쁨의 전제 조건은 하나님 안에 자신의 삶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인생의 존재 자체를 감사하게 됩니다. 존재 자체를 감사하는 사람은 살아 있다면 그 자체가 감사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 삶 속에 때로 슬픔과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도 그냥 감사한 삶의 일부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삶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한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니 교회 생활 한다고 남들 누리는 것 포기하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고난을 견디면 육신의 평안이라는 복을 주시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은 인생이 복음 안에 있다면 인생이 쇠약해지는 고난은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것 볼 것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육신의 운명을 보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평안을 보존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에 육신을 드리신 것을 보고 그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육신의 평안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정말로 어이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도 인생이 피조물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므로 육신에게 임한 고난의 의미도 모르며 그저 그것을 이기고 싶어만 하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잘 이겨지지 않으니 그것을 미화해서 이것을 견디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덧칠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관계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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