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1-37장) 엘리후의 책망 – 6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30. 08:23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이 사람을 또 세상을 경영하시는 그 경영의 일부로서 사람이 때로 고난을 겪는다는 것은 사람이 살면서 당하는 고난에 대한 의미를 잘 알지 못하니 그렇게 퉁치고 가려는 사람들을 위한 변명이 아닙니다. 아픔이나 고통 그리고 고난과 같은 것은 부정적인 것이므로 그런 일을 당한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 이렇게 적어 놓은 것을 보면 아닐 것 같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자신에게 부정적인 일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본능에 가깝게 ‘내가 하나님께 뭘 잘못했나?’이렇게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일에 대한 관점입니다.


욥기는 이것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말씀하는 책입니다. 욥의 세 친구가 욥을 책망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현재 욥이 당한 꼴을 보니 거두절미하고 이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결과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욥기를 포스팅하면서 지속적으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에게 일어난 부정한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지은 반대급부라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는 육신을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심판하고 부정하게 보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고,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심판의 기준으로 보신다는 것을 뼈대로 삼고 있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바라는 열매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세상 가치관이 말하는 성공의 의복을 입은 육신의 평안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생각입니다. 실상 세상의 모든 철학적 고찰과 종교적 사상도 이것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가치관은 부정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부정하게 봅니다. 따라서 육신의 삶에 일어난 부정한 일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 것이 될 뿐 절대로 하나님의 경영하심의 일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때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이나 벌을 잘 견디면 이후에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생각일 뿐입니다, 먼저는 견딘 이후에 받는 복이라는 것이 앞서 언급한 부정한 것들이 삶에서 없어지는 것, 곧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것이 그렇고, 그 바라는 바를 위하여 또 무언가 행동으로 견디고 행하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생각은 인생의 목적이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고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이며 세상에서 성공한 것이며, 자식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되도록 수고하는 것이 인생의 참된 의미며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전적으로 주권을 사람에게 두고 있습니다. 육신의 평안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생의 주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스스로 시작하지 않은 인생의 목적을 자신들이 정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동차의 존재 목적이 깨끗하게 실내에서 잘 보전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은 그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이 그것이 아닌 이유의 절대적 시작점은 인생을 스스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스스로의 기능을 자랑하기 위하여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니듯 사람도 삶 자체가 평안해지는 것을 목적으로 삼기 위하여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인생을 보전하려는 것은 자신을 위한 생각의 정점이기 때문입니다.


자동차가 스스로 목적을 정하고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니듯, 스스로 인생을 선택한 것이 아닌 육신을 가진 인생은 인생을 주신 이가 분명히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것인데, 이것이 자신의 믿음이라면 당연히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임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안다면 자신의 삶이 평안해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삶이 평안해지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심지어 그것을 하나님께 바라고 있습니다. 그 믿음과 신앙과 가치관이 육신의 평안에 부정적인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벌하신다고 생각하고 그 이유는 자신이 행위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거나 행위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지키고 행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인생의 목적을 모른다는 것을 온 세상에 떠버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인생에서 일어나는 곤고한 일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곤고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면 예수님은 더할 나위 없는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당연히 십자가를 지신 것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 사는 생명의 빛을 주시기 위하여 사람을 경영하십니다. 그 경영은 육신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것을 위하여 육신을 소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단 한 번만 살며, 살면 살수록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마치 일회용 종이컵으로 물을 여러 번 마시면 컵이 물러지고 종국에는 버려야할 지경이 되지만 그렇게 소비되고 가치가 사라지는 만큼 존재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때로 겪는 곤고한 일이나 반대로 좋은 일이나 모두 하나님께서 육신의 삶을 주신 목적을 이루시는 경영 안에 있고, 사람이 어떻게 느끼든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절대적으로 그 목적에 부합되는지의 여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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