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질문을 촉발한 욥의 여정 - 1

욥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 답을 듣고자 하심이 아닙니다. 부정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욥의 기를 죽여서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게 하시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질문은 욥이 하나님께 원망하는 원망 속에 담긴 의문들에 대한 답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언어구조로 보면 질문이지만 내용은 답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질문 다음에 욥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마나 사자나 악어와 같은 짐승들의 어떠함을 욥이 알고 있느냐를 물으시는 것은 애초부터 욥이 답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질문들은 지금의 과학으로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들의 목적은 욥이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 원하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 즉 창조의 목적을 알고 있느냐의 문제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께 원망을 했던 것은 하나님을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고, 그것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인 만큼 정말로 귀한 것이니 그 귀함에 맞는 삶의 귀함이 주어져야 하는 것 같은데 자신은 오히려 고난을 받고 있으니 하나님을 바로 알아도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고난은 하나님이 고의로 자신을 대하시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욥의 원망 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삶에 고유의 곤고함이 있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면 욥의 말 속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것을 억지로 끄집어낸 것 같지만 그것이 억지로 끄집어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육신을 가진 인생을 바라보는 안목이 평안해야 선한 것이고 불편한 상황은 악을 인한 형벌이라고 생각하는 색안경을 인하여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이 색안경이지 사실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의 가장 기초적인 시작입니다. 출애굽의 여정으로 본다면 막 애굽을 떠나는 단계 정도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 친구들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생각은 욥을 시험하고자 한 사탄의 생각과도 결이 같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의 여정은 하나님은 행위를 의롭게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것으로 여기겠지만 욥기 내내 언급한 바와 같이 일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없는지 돌아보는 가치관을 가졌다면 사람을 하나님은 행위로 판단하시는 분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에 속하지 자신들의 생각과 같이 하나님은 믿음만 보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착각일 뿐.


사람이 하나님은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으려면 먼저 자신이 드리는 행위의 제사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무한 반복되는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위는 늘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지키려고 했는데 부지불식중에 화를 내는 것이 회개하고 노력해도 반복되는 자신의 모습에 의구심을 가지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경대로 살려는 노력이 늘 좌절되는 것은 단지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고 더 나아가서 육신이 부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더 노력합니다. 그런 시도를 성공한 사람이 아담 이래로 아무도 없었고 성경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 세상이 아직 망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아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 하나님께서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계속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십자가 세운 교회에 다니면서 행위를 정결하게 된다고 가르치고 주장해도 그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은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하나님께서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은 쉽지만 어디로 가야할지를 아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를 알게 되려면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이것은 욥기가 아닌 다른 성경에서 또 다루기로 하고,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은 광야를 지나서 요단강을 건너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와야 진정한 거듭남이고 생명이 있는 존재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렵게 거기까지 온다면 그제야 욥기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지 않는 분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행위에 있지 않고 존재의 정체성, 하나님의 관계성에 있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자랑할 정도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끝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리에 들어간 사람은 자기 안에 욥의 원망을 이해할 수 있는 체휼함이 유전자와 같이 있음을 알게 되기에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욥을 사탄에게 자랑할 정도의 생명이 되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종교라는 프레임 안에서 신학을 하고, 그 신학 수료자에게 권세를 주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행동에 대한 연구 결과를 내어 놓으라고 헌금을 하면서 그것을 듣고서 노력하는 신앙이 정통 신앙이라고 우기고 그것이 아니라고 외치면 세 친구들과 같이 자신을 대할지라도 그것이 아님을 굳건하게 믿는 믿음이 자기 안에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여기가 신앙의 본론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존재의 목적을 깨닫는 과정이고 그리고 나서 그 알게 된 것이 어떤 의미며, 그것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욥은 그것을 알아야 하는 자리까지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고 난 다음 인생의 방향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는데 육신의 삶도 여상한 것 같고, 또 어디로 가야하는지 불문명한 것도 여전한 것 같은 갈등이 바로 욥이 겪은 고난이고, 그 고난 중에서 보니 하나님을 알았지만 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한탄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욥의 여정과 심정은 정말로 극히 일부의 인생들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숨겨 두어서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보여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육신을 부정하게 보고, 행위로 그것을 만회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공개되었지만 자기 눈이 어두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노라하며 목사다 신학박사다 혹은 기도하면 능력이 나타난다며 떠들어도 이것을 아는 사람은 정말로 별로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의 심정을 알면 신학을 신봉하지도 않을 것이며, 기도하여 병을 낫게 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며, 교회에 가서 세상을 바로 잡아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을 것이며, 육신의 평안을 강구하거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며 그것을 구하는 기도는 더더욱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은 양이 고기를 먹어야 하는 것과 같기에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불가항력의 심정을 알 수 없다면 욥의 고난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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