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 났다는 것



하나님께로 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누가 누구에서 났다'라는 말이 아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던 것이 표현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아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난 처음 열매이자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 외에 하나님께로 난 육신은 없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정체성을 가졌다는 의미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목적도 그것이었고, 또한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가 되는 것에 대하여 쉽게 이야기 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혼돈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최초의 모양 그대로의 모습에 순종하고 그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임을 상실했기 때문에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어려워한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지 2,000년 전 유대 땅에 오신 예수님과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혹은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뜻이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내용과 형식이 합해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지 존재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이다. 그것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의 정체성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깨닫는 것이다. 그 깨달음이 있다면 하나님 안에서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생명이 되는 것이 구원이고 부활인 것이다.


세례라는 것은 죽고 사는 것인데, 이는 죽었다가 죽기 전과 동일한 정체성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이전과 동일한 생명이라면 뭐 하러 다시 살겠는가? 죽을 때는 육신 가진 삶이 저주스럽고 언제라도 벗고 싶은 마음이었다가 다시 살아 날 때는 그것이 아니라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진정한 도구며 형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세례이고 부활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십자가에 있다. 연약한 육신, 모든 사람들이 그 한계 너머를 늘 꿈꾸는 이 육신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또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예수님은 육신을 부인하거나 이 육신을 율법으로 제어하여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유대인들에게와 또 세상적인 소유와 지위가 없는 주제에 왕이라고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로마인들에게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바로 그런 사람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살리셨다는 것이라기보다 그런 모습은 하나님께는 너무나 당연하게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신 그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람의 원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그 모습 그대로인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인 하나님의 이미지를 가장 잘 나타내는 모습 그대로의 사람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이 육신을 가졌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이 육신을 가졌다는 것을 부끄러워한 것은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 생긴 마음이다. 그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듯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자신을 가리려 했고,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법 곧 피라미드와 같이 꼭대기로 가야 인정하는 법으로 사람이 육신 가진 것을 가리려 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자신의 기준으로 사람이 육신을 가졌다는 것을 감추는 것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에덴(만족)동산에 둘 수 없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육신 가졌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부인하면 스스로가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로 난 자가 아니다.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나타내며 대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다스리고 사람 위에 서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을 모르면 신비할수록 좋은 신앙이라 생각하고 시험과 공로라는 세상의 법칙에 의하여 목사가 되어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원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려는 것을 아는 사람이고 이것을 표현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원 모습은 사람이 연약하고 전혀 고상하지 않은 이 육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육신이 가진 한계를 부끄러움과 연약하고 고상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안목은 세상의 안목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총칭한 사도 요한의 표현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인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다 사람의 육신에 대하여 무언가를 더하고 절제된 것이 더 나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사람 안에 있는 욕망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 체 발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로 났다면 사람을 보고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께로 난 것을 아는데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멸시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보고 비난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뿐이다. 비난의 이유가 설사 신앙의 어떠함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로 난 자를 사랑하는 것



또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분명히 안다는 것이고, 그것은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하게 밝아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의미인데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람을 미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로 난 사람인데 그 사람이 자신과 같이 하나님께로 난 사람을 미워하거나 배척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의 육신의 어떤 모습이든지 아니면 신앙을 표현하는 가치관이든지 그 어떤 모양이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인 자신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신앙 고백이 있다면 사랑하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고, 그런 신앙이 자신의 삶이고 정체성인 사람이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께로 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자신과 동일한 생명, 같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난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께로 난 자를 사랑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것이 사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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