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4장 7-21절) 거짓 없는 사랑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2. 21. 07:26 Writer : 김홍덕

요한일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랑, 그것은 곧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심과 같은 것이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의 백성이자 아들 삼으시고자 하신 뜻을 전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심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두어 가지 있는데 그 처음은 이 사랑의 방향성이다. 즉 이 사랑은 사람에게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에 있으므로 사람의 정체성과 존재의 목적을 알고 있는 이에서 그렇지 않은 이에게로 베풀어지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처음은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것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에 관한 시작과 끝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이것이 알파와 오메가라 하신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있다는 것, 사람의 존재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사람의 존재 목적은 사람이 강해지고 더 위대해지는 것에 있는 것에 있지 않다. 또한 사람이 가진 본성인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것을 금하면 금할수록 경건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도전하고 하나님이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한 사람을 부정하고 불량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사람에 대한 목적, 즉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사랑은 사람의 모습 그대로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의 모든 한계를 보여 주는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만약에 사람의 모습 그대로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부족하고, 지금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세상에서 더 경쟁력을 가질수록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존재가 된다거나, 종교에서 많이들 가르치듯 금욕하고 도덕적일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존재라면 예수님을 육신으로 보내시고 기뻐하는 자라 하시지 않고 천사를 보내셨을 것이다.


바로 이 관점을 모르면 율법주의나 영지주의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부족하다고 여겨 끊임없이 율법으로 경건해지려 하는 것도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함이고, 오신 예수님의 육신을 부인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전체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한 방향성이 있다. 이 사랑이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그것을 표현하는 삶이 사랑하는 삶


그러므로 이 사랑을 사람에게 전하는 것 역시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깨달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사랑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우리와 동일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비밀의 하나인 것이다.


사람이 그 심령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을 때 그 사람은 내용인 하나님의 의가 안에 있고, 또한 육신 가진 삶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그것이 표현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이며, 그 육신 가진 삶이라는 형식으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모든 것이 다 사람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말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삶 안에서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천지가 시작된 태초가 열린 사람이며,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형제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형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삼으신 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사랑을 입은 사람이다. 그리고 안에 있는 그 사랑이 삶이라는, 육신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될 때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용과 형식 어느 하나가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거짓말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과 같은 것이 거짓말이다. 


군인이 아닌데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자 사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가진 것을 베푸는 것도 거짓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 속에 하나님의 의가 있노라 하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며 다른 사람이 그것을 깨닫도록 자신이 가진 것을 베풀지 않는 것 역시 거짓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베푸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그것은 사랑의 표현 방식이므로 사랑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가진 것을 아무리 베풀어도 그 목적이 사람의 존재 의미와 목적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늬만 사랑인 것일 뿐 진정한 사랑도 아니며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또한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있노라 하고 가난한 형제와 또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뜻을 전하기 위한 수고를 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 하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노라 하고 그것을 전함에 있어 어떤 계층이나 어떤 행동 양식을 가진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먼저 선을 긋고 있는 것도 거짓말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방향성이 있다. 먼저 알고 더 아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예수님께서 의인이지만 죄인 되신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즉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은 늘 하나님의 의와 뜻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을 죄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당연한 모순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나게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와 뜻을 더 깊이 아는 사람일수록 그렇지 않고 세상적 기준이 더 많은 사람 앞에서 늘 죄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기준에 의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그런 모순과 무지 때문인 것처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아노라 하고 또 많이 아노라 하는 사람이 세상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정죄하여 죄인을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의를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기독교의 한 단면이라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소위 교회에 다니는 사람,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다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세상을 늘 폄하하고 동냥해 주듯이 대하는 그 태도야 말로 거짓말하는 사람의 전형인 것이다. 하나님을 먼저 알고 또 하나님의 의와 뜻을 더 많이 알수록 그렇지 않은 사람 앞에서 늘 죄인이 되고, 십자가에 달려서 사람의 한계를 보이는 것이 온전한 사랑이지,


신앙이 없다고 차별하고, 또 신앙이 부족하다고 낮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설사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육신 가진 삶을 수고하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사람을 강제로 깨우치게 하려 하는 것은 다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구는 것일 뿐 사랑도 전도도 훈계도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거짓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그 안에 있는 것이며 또한 육신의 삶을 통해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표현이 사랑이고 그 표현의 내용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부여하신 사람의 존재 목적이며 사람의 존재 의미인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하는 삶은 세상적 관점으로 볼 때는 언제나 조롱거리와 십자가에 달려야하는 죄인처럼 여김을 받는다. 하지만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방법은 없다. 만약 있다면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그 방법을 택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의 신앙은 사람을 가르쳐서 구원을 또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 한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천둥과 번개로 사람을 두렵게 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며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그 안에 아무리 대단하고 놀라운 비밀이 있어도 늘 시끄럽고 분쟁하며 또한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 존재의 목적과 의미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또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생명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이 사랑이라는 표현을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고, 그것을 삶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자신의 것을 베푸는 것이 바로 사랑이며, 그 사랑은 언제나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세계이다. 그것은 늘 가졌기 때문에 죄인 취급 받아 죄인이 되어 가졌다고 비난한 사람이 다시 가진 자가 되게 하는 법이다. 가졌다는 것은 돈과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즉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죄인과 같은 취급을 받아 십자가에 끌려간다. 예수님이 그러했기 때문에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사람에게 하나님의 법을 전할 법이 없다. 여기에 부활이 있는 것이다. 죄인이 되어 죽는데 생명이 살아나는 부활의 법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것이다. 그 어느 하나가 빠진 것은 다 거짓말 하는 것이고 율법주의나 영지주의와 같은 변질된 신앙이나 세상적인 사랑에 불과한 것이다.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먼저 가지고 계신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한 삶을 말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