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하나님께로 난 같은 아버지의 생명을 받은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신다. 계명이라고 하면 십계명과 같은 행동 강령이나 규율과 같은 것이라는 느낌으로 받지만 그런 것은 모두 하나님 계명의 세칙이지 계명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니까 세법에 세금 내지 않으면 압류나 강제 징수를 하겠다고 되어 있다고 세법의 목적이 압류나 징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사업에 필요로 하는 세금을 모으고 집행하는 것에 있는 것이듯,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생각하는 여러 가지 규범이 계명의 목적이 아니며 십계명을 비롯한 성경의 모든 말씀의 목적이 사람이 그 정체성을 회복하여 의미를 가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은 안식일이나 주일을 지키는 것과 같은 행동 규범에 있는 것이나 어떤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곧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삶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거나 부인하거나 십계명과 같이 계명의 목적을 설명하기 위한 표현에 매몰된 것은 하나님의 계명도 사랑도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도 예수님이 오신 목적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은 밥 퍼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 목적을 깨닫게 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밥을 퍼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존재의 목적을 나눈 사람들은 형제며 그 형제들은 삶의 모든 형식을 나누고 희생하며 수고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그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 그 계명에 세상적인 윤리나 법을 더하는 자, 그 계명의 본질인 육신으로 주신 삶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로서의 정체성의 어떤 부분, 육신이나 내용을 버리고 하나만 선택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사랑도 알지 못하며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다.


그런 사람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주여! 주여! 부르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병자를 고치며, 40일 금식을 수 없이 하며, 결혼하지 않고 매일 수도하며 기도하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종교적 지위나 명예를 얻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명도 사랑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당시에 유대인을 책망하신 것이 그들이 도적질을 하거나 강도거나 아무 여자나 범하거나 창녀와 놀거나 나라를 팔거나 이방 신에게 절해서가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자 사람을 향하신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시대의 교회가 유대인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그렇듯 본질을 모르고 계명을 지키는 것은 너무 무겁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가 고양이 소리를 내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의 본질이 형식을 지켜 내용을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빈 그릇과 같이 내용을 담아 그릇의 정체성이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창조의 목적이자 존재의 목적이 자신의 내용이자 본질이 되어 육신을 가진 형식이라는 삶으로 표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방향이 명확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지, 사람이 스스로 생겨서 숨어 있는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마 11:28)"하셨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인생의 수고가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수고가 그치려면 장례식장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수고와 무거운 짐은 육신이 먹고 살아가는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7-3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수고와 무거운 짐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매겨놓은 원래의 존재 목적과 본성에 맞지 않고 살아가는 수고와 그 짐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에게 고양이 소리를 내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그 수고와 짐을 내려놓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을 인생의 수고와 육신의 삶이 가진 생계의 짐이라고 한정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사랑과 계명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 많은 교회가 그렇게 설교하고 있다. 그것은 계명과 다른 세상의 법으로 시험치고 경쟁력을 갖추고 강단에 섰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실 때 그 앞에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짐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앞에서 계속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것 외에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과 사람이 관계성이 형성되고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데 아들이 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성을 지키기 위하여 수고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생명으로 난 것 그것이면 족하고 충분하기 때문이다.


고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은 아들이 되는 것이다. 아들이 되는 것은 짐을 지는 수고에 있지 않다. 생명이 육신으로 표현되면 그것이 아들인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계명도 하나요, 사람 지으신 목적도 하나며, 사람과 하나님의 회복된 관계도 하나이니 곧 아버지와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 사랑의 법, 아들을 아는 것, 자신이 지어진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는 것은 수고로운 것이 아니다. 무거운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므로 계명은 아주 가벼운 것이다. 행여 교회에서 원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신앙이 싫은 것이라 억지로 하고 있다면 그것은 가벼운 계명도 아니고 예수님의 멍에도 아니다. 그것은 온전치 못한 복음이며,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사랑이 중요한 만큼 어렵고 계명이 중한 만큼 무겁고 어려운 것이라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건 어쩌면 주신대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체념적으로 산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과 삶을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게 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도 자신이 무엇을 만들면 쉽게 작동되고 어렵지 않게 만들려고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그러시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이 휩쓸리듯 세상의 흐름을 따라 어떻게든 피라미드의 꼭대로 향하려고 단단한 벽돌을 만들기 위하여 흙 안에 껍데기인 볏짚을 넣고 또 단단하게 하려고 굽듯이 사람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또 연약함을 감추고 고상하려 애쓰다 어느 날 문득 "왜 사는지?"라는 질문 앞에 허망하게 되는 그 수고와 짐과 그 허망함 이기려 억지로 억지로 지켜보는 계명의 무거움을 벗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계명은 쉬운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그저 하나님께서 지으실 때 이 몸과 이 연약한 삶을 주신 이유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아는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왜 힘들겠는가? 하지만 그 연약함도 세상의 법으로 볼 때 연약한 것이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하나님의 의와 뜻 안에서 보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기적이고 능력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법과 사람의 안목으로 볼 때 그렇게 부족해 보이는 이 육신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성전이요 그릇이며 형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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