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이기심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심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면서 보여주신 것이 시작이라면 완성이자 결정체는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다. 실재로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 이어지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에서부터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 이르기까지 말씀하신 내용은 정말로 예수님 사역의 의미를 온전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 안에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요한사도가 기록하고 있다. 이 요한 사도가 요한 일서에서 세상을 이긴 이김이 무엇인지를 말하면서 하나님께로 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 이후 하신 말씀을 그 때는 다 알아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특히나 17장의 기도문의 경우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은데,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나마 또 졸고 있었다. 설자 예수님께서 아주 큰소리로 기도하셔서 그것을 다 기억하고 있다 해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기에 병사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다 도망가 버린 것이다.


그런 요한 사도와 사도들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때 하신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가시고 나면 예수님의 하신 모든 말씀이 생각나고 기억났기도 했고,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고서 예수님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께로 난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믿음이란 무엇을 믿는 것인지에 대하여 요한의 마음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듯 깨달아졌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법이 적용된다. 성경을 읽어도 알지 못하다가 십자가의 사건이 가진 정체성과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안에 믿음이 있게 되고 하나님의 빛이 비취는 세로운 세계의 시작이 열리는 것이다.


이는 세상을 이긴 이김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아는 것은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생명의 세계이며 이러한 모든 것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과 십자가와 부활을 보면서 그것이 자신의 사건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서 열리게 될 때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객관적으로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믿음이란 자기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이 자기의 모습과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것이 동화되듯 열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은 초라한 모습일 수 없고, 나사렛과 같은 천한 출신이 될 수 없고,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라는 세상의 법아래 세상이 연약하게 또 죄인으로 여기는 육신을 가진 삶을 살면서 그것을 세상과 같이 연약하고 추한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아들 삼으시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심을 안에서부터 믿어 삶으로 표현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세상을 이긴 이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세상을 이기신 이김은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다. 십자가 밑에 있던 세상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능력을 ㅂ여주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십자가에서 그냥 돌아가셨고 그것이 바로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고 하신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세상을 이긴 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세상의 경쟁 방식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기는 것이라 믿는다. 즉 세상이 경쟁하는 방식인 시험에서 교회에 다시는 사람이 합격하면 세상을 이긴 것이라 생각하고, 세상이 끊임없이 경쟁하는 부자가 되는 경쟁에서 이겨서 부자가 되면 이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교회, 특별히 큰 교회들의 기본적인 생각인 듯하다. 교회를 일단 크게 지어놓으면 사람이 모인다고 생각하기에 신도시가 건설되면 가장 먼저 교회가 크게 지어지고, 또 사람들의 눈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의 큰돈으로 화려한 성전을 짓고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고 생각하는 결정체인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지금의 많은 사람들과 교회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각양의 경쟁이나 다툼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이겨내서 1등하고 부자 되고 화려해지고 고상해지는 것이 이김이라 생각하지만 바로 그 세상의 법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신앙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법으로 이기면 세상에서 승리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건 아주 어리석은 믿음이다.


예수님의 이기심은 오히려 세상의 법 안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법 때문에 죄인 되고 십자가를 지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을 이긴 예수님의 이김이고 승리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하나님께로 난 자가 아니며, 이것을 모르면 세상을 이긴 것이 아니라 세상의 종일뿐인 것이다.


건축자들은 버린 돌, 세상의 법으로 볼 때는 아무짝에도 쓸데없고, 그 법으로 보면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 또한 유대인의 왕이라 할 수 없는 초라한 사람의 모습, 그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때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고, 또한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우리 사람의 본질적인 정체성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람의 보습이다.


그래서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듯이 그 세상의 법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것이다. 세상의 법 아래서는 죄인 되고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죽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 안에서는 진정으로 살았다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이다. 이 비밀을 모르면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구원과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세상의 법과 프레임 안에 있는 경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보여주신 기적이 객관적인 사살이라 믿는 믿음을 가지면 이기고 승리하여 1등 되고 부자 되고 고상한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화려하게 짓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그것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못한 것이고 십자가를 욕보이는 것일 뿐 믿음도 하나님의 아들의 삶도 또 세상을 이긴 이김이 아니다. 그것 그냥 하나님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고 자기의 신념에 매몰된 자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아무리 밥을 퍼 주고 또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해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사람의 창조와 존재 목적을 아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랑이 없는 것이며 계명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세상의 법,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생각에 끌려가서 자신이 죄인이 되는 삶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요구하는 경쟁의 법과 프레임 안에서 자신은 늘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것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죽을 때 살아나고 이기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고 자신의 본성이며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죽고자 하면 사는 법이고, 죄인이 의인을 위하여 죄인 되는 법이며, 이것을 알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사랑이며 이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삶이며,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고 이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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