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5장 1-12절) 세상을 이기는 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2. 27. 08:20 Writer : 김홍덕

또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에 심각한 오해가 있는데 그것은 이기는 방법이다. 예수님과는 너무나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이기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져서 이겼는데 사람들은 이겨서 이기려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오만함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선민의식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은 구원을 받았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차이를 지위나 역할의 차이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사람이 구원을 베풀고, 신앙을 가진 사람이 신앙이 없는 사람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고 신앙을 가지고 있고 구원을 받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진 자로서 베풀어야 한다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그것까지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하는 자리가 낮은 자리인지 아닌지는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범하는 기독교인의 두 가지 오류



이 시대에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외면적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람과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거나 죄를 짓고는 그 앞에는 반성하거나 죄 값을 치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그만이라는 편리한 속죄의 방식과 또 하나는 복음을 가졌다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하여 이른바 갑질을 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런 두 가지 형태는 다 하나님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과 세상과 사회 속에서 살게 하신 목적을 안다면 사회 속에서 지은 죄는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는 사람들에게 짓고 하나님께 회개하면 된다고 주장하니

사람들이 이런 대안 없는 비판을 영화로까지 만드는 것이다.(영화 <쿼바디스> 홍보 영상)


예수님은 당시 세상의 법에 의하여 실재로 죄를 지은 것이 없지만 하나님과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십자가를 지게 한 것도 순종하셨는데 지금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 세상이 자신을 정죄하는 것, 더더욱 자신이 지은 죄가 실정법을 위반한 것이 분명함에도 하나님이 용서하시면 되는 것이라 편리하게 생각하고 그것이 세상을 이긴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마음으로는 솔직히 그런 형태를 미친 짓이라고 하고 싶다.)



밤 늦은 시각 서울역에서 부흥회하듯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갑질>이다


또 하나는 복음에 대하여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가진 사람이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나누어주듯이 베푸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런 것을 지금 시대적인 표현으로 <갑질>이라고 할 것이다.즉 복음에 관한 갑질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복음에 대하여 대단한 열정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그것은 복음에 대하여 주인 노릇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권능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아주 교묘하고 또 많은 경우 좋은 신앙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어떤 교회에서 청년들이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하여 가정에서 반대가 심하면 나와서 사는 것이 복음적이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그 상황을 짧은 말로 상황이 전부 정리되게 설명하기 힘들고 또 그 나름의 사유가 있고, 또 그것이 불가피한 경우도 실제로 많지만, 교회의 모임에 다녀오느라 늦게 오는 문제에 대하여 부부간에 또 부자간에 갈등이 일어나면 이혼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고 부모를 떠나 다른 교인의 집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신앙적 결단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바로 갑질의 형태라는 것이다.


복음은 그렇게 전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다. 정말로 복음의 능력을 믿는다면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될 것은 된다고 믿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도전이 자기가 꿈꾸는 세상은 자신이 아니면 다음 세대, 그 세대도 아니면 또 다음 세대에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즉 자신이 꿈꾸는 세상은 반드시 올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예수님의 모습도 그러했다. 예수님도 분명히 말고의 귀를 자르는 베드로에게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을 불러 예수님을 잡으러 온 병사들을 물리칠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정도전도 그 당시 얼마든지 정몽주를 죽일 수 있었지만 꿈꾸는 세상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예수님도 역시 그렇게 천군천사가 예수님을 구해내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하셨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더 온전한 복음을 가진 사람이 사람관계에서 지위적인 상관이 되는 권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온전한 복음과 더 밝은 하나님의 계시를 알면 알수록 그 밝은 계시를 가지고 사람 위에서 가르치듯 또 심판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가졌기에 종이 되고 죄인이 되는 법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법이고 예수님이 세상을 이긴 법이다.


대학생 때 친구들과 신앙 토론을 자주 하곤 했다. 그 중에 신학생이 몇 있었는데 다툼이 좀 심화되고 정리가 안 되면 그 중에 한 친구가 하는 말이 있었다. "야 임마 신학생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라."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바로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갑질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난 복음이 있고 넌 없으니 내가 옳다는 것, 그것은 올바른 모습이 분명 아니다.


물론 계시가 밝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것은 그 마음이 듣기로 작정하고 순종이 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그런 문제로 부딪히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때 죄인이 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될 수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또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하여 예수님보다 더 분명히 아는 분이 있겠는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쥐뿔도 모르는 사람들의 손에 잡혀 십자가를 지셨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죄인이 되려 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이 되면 물리쳐야 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법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긴 법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은 너 같은 모습이 아니라며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 것에 순종하시고 그 순종이 하나님의 법으로는 이긴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신 이김이다.


그런데 부모나 배우자가 교회 생활이나 신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며 배척하고 무시하는 갑질을 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해야 복음이 온전해 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을 이긴 이김이 아니라 세상의 법을 자신의 법으로 삼은 것이다. 즉 그것은 세상에게 지고 세상의 법에 종이 되는 것이다. 또 그것은 복음이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자신이 복음의 주인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김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 아래서는 세상에 온전히 패한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법은 지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온전한 의인이시면서 죄인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죽이려 하는 것 앞에서 호통 치거나 무찌르거나 하신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십자가로 또 죽음으로 끌고 가는 것에 순종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다.


아마 이것은 현대의 신앙인들이 가장 잘 알지 못하는 것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정말로 이것은 교묘하고 정말로 이것은 내려놓기 힘든 것이다. 신앙적 관점이 자신과 부족하다 여기는 사람에게 큰 소리 치고 다투고 또 꾸짖고 그것으로 갈등을 겪는 이유가 다 이런 것에 있다.


하나님의 권능을 정말로 믿고 복음의 능력을 믿으면 십자가로 끌려 갈 수 있다. 오늘 지금 내 앞에서 복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증명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능력은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신념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운명 같은, 그리고 거절할 수 없이 이루어짐을 본능처럼 아는 믿음



이 믿음은 자기 안에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하여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 그런 것은 오직 하나 생명 밖에 없다. 사람은 자신이 사람 같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란 유전자로 났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라도 사람으로 살 수 밖에 없음을 안다. 심지어 그것을 인식도 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듯 하나님 말씀의 역사가 어떻게 되는지가 분명하게 열린 사람은 언제나 십자가를 질 수 있고, 자신 보다 신앙이 부족한 사람 앞에서 언제나 죄인 되고 또 그를 위해 수고하고 죽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바로 하나님께로 난 사람이며,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와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고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이기는 법은 죽어서 이기는 법이다. 가르쳐서 이기는 것도 아니고, 정복하여 이기는 것도 아니며, 지금 당장 밝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은 죽되 하나님께서 살리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아니 죽고 난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자신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송사 앞에 죄인 되는 사람이다.


'복음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꼴을 당해서야 되겠느냐?'라든가, '이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되겠느냐?'라거나, '그래서 예수 믿는다고 하겠는가?' 하고, 복음을 알지 못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다 핑계요 변명이요 타협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을 이기는 이김이 아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져서 이기는 법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법은 세상의 프레임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예수님의 이김은 언제나 가지고 밝고 의로운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이다. 상대를 제압하고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죄인 되는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이 그 마음에 깨달음이 생기고 마음 안에서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스스로 자복하게 하는 그 법인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여주신 세상을 이기신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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