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사도는 하나님께로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하신다.(요일 5:4) 그리고 그 이기는 근거는 <믿음>이라고 하신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께로 난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것이라는 말씀이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 이후 제자들에게 길게 말씀하신 내용들 중에 요한복음 16장 마지막에 나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신 다음에 병사들에게 잡혀가시고 석방되지 않고 그 길로 십자가를 지시게 된다. 그리고 '담대하라' 부탁한 제자들은 모두 떠나가게 된다. 그것은 언뜻 이긴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도무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어떤 것일까? 그 이김의 근거가 되는 것이 믿음이라 했는데 그 믿음은 또 어떤 것인가?


사람들은 이겼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있는데 한마디로 하면 자기의 뜻과 목표가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놓고 자기의 겉옷을 예수님 가시는 길에 놓으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환영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심판을 받자 바라바를 선택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길 것이라 기대했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로마로부터의 통치를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실상은 잡혀서 심문을 받으니 자신들의 기대를 배신한 예수님을 배신해 버렸다. 그들의 뜻과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거나 자신들을 해방시킬 메시야가 아니라 생각한 것이다.


이는 예수님과 사람들이 이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는 것이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생존 경쟁에서 예수 믿는 믿음이 있으면 이긴다는 것이며, 또한 사람이 가진 각종 본능을 억제하고 유혹을 이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이르고, 또 부자가 되며, 또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김은 세상의 법이다.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라가서 세상을 더 풍족히 누리기 위한 다툼의 승리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법아래 있는 이김이지 예수님의 이김이 아니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께로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했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 어떤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이김이다. 그 예수님의 이김의 시작은 40일 금식 이후에 받으신 시험을 이기신 것이고, 대미는 십자가와 부활로 세상을 이기신 이김이다.




마귀의 시험에 이기심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 할 때 단서가 있었다. 그것은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다. 즉 다시 말해서 '네가 하나님께로 나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이라는 조건으로 예수님을 시험했다는 것이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로 떡을 만들고,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온 세상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이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어떤 시험도 마귀의 요구대로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귀의 요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과, 세상의 모든 영광을 얻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과 세상의 모든 영광의 주인이 되는 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은 돌에 새긴 율법을 떡처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은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다치지 않는 육신의 한계를 극복한 존재도 아니며, 또한 눈에 보이는 세상이 실존이나 경배할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율법을 죽어라 지켜내는 것도 아니며,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도 아니며,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승리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이기신 이김은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이김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겨내서 강해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세상을 얻는 것이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만 경배하는 것이 시험을 그리고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은 기적을 보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금식한 예수님을 먹을 것으로 유혹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가진 배고픔 중에 가장 큰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배고픔이다. 즉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사는지에 대한 배고픔이 가장 크다. 그 배고픔을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을 잘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는 유혹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을 더 잘 지키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사는 모든 것이 바로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 신앙이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이 가진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정의이다.


또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는 것은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육신의 한계를 극복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이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거나 십자가에 못 박혀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지주의 신앙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이 육신의 한계 너머의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육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에 불요한 것이며, 이 육신의 삶은 구원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영지주의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다들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잘 지켜 행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금식하고 철야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법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생각과 같은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의 표현과 본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며, 육신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 기적을 행하여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는 연약한 육신을 하나님께서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고 믿음이며,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영광을 얻는 것이 눈에 보이는 세상을 얻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하 만물, 눈에 보이는 이 세상, 피라미드와 같이 끊임없이 높은 곳으로 또 높은 곳을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에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교회를 화려하게 짓고,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의 높은 자리에 오르고 부자가 되는 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 세상의 본질이 눈에 보이는 이 천하 만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것,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상의 본질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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