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 기독 신앙의 대명사와 같은 사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의 정체성을 알도록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쳐서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예수님께서 몸소 실천하신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니 뭔가 기독교적 색채가 먼저 떠오를지 모르지만 그것이 사람의 정체성, 삶의 목적이자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를 알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것은 기독교의 사랑이라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절실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하기에 이 하나님의 사랑이 온 인류를 위한 사랑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본이 되고 인류의 구주가 되심이 또한 그 사랑을 몸소 보이셨기 때문이다. 사람들,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람의 모습을 상실한 사람들이 그것을 알도록 십자가를 지고 또 달리셔서 죽으심으로 사람에게 그 정체성을 보여주신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을 차비를 대신하듯, 남이 지은 죄를 대신 벌 받은 것으로 겉모습만을 전부로 치환하여 남을 위하여 희생과 수고를 하는 것이 사랑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하나님이 내신 이로 보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이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살아 있고 하나님께 의미가 있는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 보여주고자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생각하고 계획하신 그 사람, 곧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그 하나님의 뜻 안에서 회복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면, 아니 그것을 위함이라면 십자가에 달리는 죄인이 되고 죽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사랑인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고 수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본질이 없으면 바울 사도의 말씀과 같이 남을 위하여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또한 그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이 내신 이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내신 이가 되신 것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생각을 표현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의 본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의와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된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래 사람을 지을 때 기대하신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된 삶이 어떤 것이지를 온전히 표현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내신 분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표현하고자 하신 사람의 모습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창조하신 분의 목적이므로 자신의 정체성이고 자신의 존재 목적이다.


어떤 존재든 존재 목적 안에 있으면 사랑을 받는 것이고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으면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이다. 야구 선수가 야구장에서 야구를 할 수 없게 되면 감독이 자신을 좋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낙심하고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이 그렇고, 누구나 가장 사랑하는 펜을 가지고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것이 그것이다. 야구 선수의 존재 의미는 야구고, 펜의 존재 의미는 글을 쓸 때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야구 선수를 가장 사랑하는 것은 야구를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지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구선수는 야구장에서 야구를 할 때 가장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고 그 스스로도 그것이 가장 행복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람도 자신의 존재 목적 안에 살 때 가장 행복한 것이며 그러하기에 사람을 가장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 존재 목적 안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느끼고 알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이며, 또 그것을 위하여 육신을 가진 삶을 수고로이 사용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기에 예수님의 삶이 사랑의 왕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으로 수고하신 사랑의 모습을 보이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도들의 삶이 또한 그러하다. 초대 교회 당시 전 세계라 할 수 있는 지역을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또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 곧 하나님께서 사랑에게 메기신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복된 소식을 전한 바울의 삶이 그러하고 거꾸로 십자가를 지기 가지 복음을 전한 베드로와 또한 교회 안에 영지주의와 같은 변질된 사상을 경계하며 평생을 교회의 순도를 지키려 한 요한 사도와 같은 이들의 삶이 굳이 밥 퍼주는 것이 아니었지만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 것이다.


그 예수님 바로 하나님이 내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 역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안에서 그를 알고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메기신 정체성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사람이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신 목적을 알려고 하고 그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신보다 뛰어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사실로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보여주신 형식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목적을 위하여 보여주신 기적과 같은 것이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것인데 그것을 자신은 상식을 넘어 인정하고 믿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금식과 고난의 형식을 행동으로 따라 하면 더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이 보여주신 형식을 믿고 얼마 되지도 않고 사람마다 다른 육신의 능력에 따라 자신이 조금 따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믿음의 차별성을 가진 것이라 착각하며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다. 그런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목회자들이다. 공부해서 신앙을 학문으로 동상처럼 고착화시킨 것을 좀 더 안다고 신앙 공동체에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이라는 정말로 많은 사도들이 경계한 변질된 신앙의 토양 안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 세상의 지위를 바탕으로 장로가 되어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일을 정치적이고 자신이 장로가 된 근본인 세상의 방식대로 결정하고 이끌어 가는 것이 얼마나 예수님을 모르는 것인지 상상도 못하고 있다.


흔히들 예수님을 해방자라고 한다. 또한 신비한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해방은 고사하고 자신의 몸 하나도 지켜내지 못하고 죄인으로 돌아가셨고, 그 많던 기적은 다 어디가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오라고 조롱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힘없이 돌아 가셨는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보여주신 당시의 권력자와 맞서는 모습이나 기적을 행하시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믿고 따라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내신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행하신 하나님의 일의 목적은 모른 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행적을 믿고, 그것에 감사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며 사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으로 주신 이 삶의 모든 수고와 희생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전하고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사람을 외모로 보거나 사람의 행위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의와 말씀과 생명이라는 본질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삶의 모든 소유와 행위와 육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질을 아는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사람의 외모와 삶의 모양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구를 어떤 것을 가졌는지가 그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또한 사람의 삶과 사람마다 다른 능력을 서로 모으고 그것에 상호 의존하며 그것을 서로 베풀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면서 까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것에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늘 협력하는 것이다.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골 2:2)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또한 하나님이 내신 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그 사람 역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런 사랑이 있는 사람은 형제 곧 예수님과 같은 삶의 목적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세상에 하나님이 보이기 원하시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며 또한 육신이 가진 모든 것을 그것을 위하여 서로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온전히 아는 사람들의 사랑이 온전하면 헌금이든 봉사든 또한 사람의 외모와 행동으로 인한 갈등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지금의 교회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제도화 할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갈등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진정한 복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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