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그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 사랑이 희생과 봉사와 같은 수고로 표현될 때 온전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사랑의 내용과 표현이 온전히 일치하는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이 서로를 위하여 가진 것을 나누는 것도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온전한 사랑이 되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뿌리가 되어야 온전한 것이다. 이것을 너무나 잘 표현한 성경이 고린도전서 13장 곧 사랑장이다.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곧 사람의 존재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해 주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이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사람과 동일한 육신으로 오셔서 표현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기 우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차비를 대신 내어주듯, 아니면 죄는 우리가 짓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육신을 가진 삶의 의미와 목적과 정체성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알려주시고자 한 사람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삶을 살던 사람이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고, 그것을 알고 살아서 하나님의 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영생인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이 가지신 사랑의 본질과 내용을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본을 보이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의미와 목적을 알게 하시는 것과 그 과정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사랑은 사람에게 삶의 존재의 목적과 의미와 인생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므로 그것을 알지 못하여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면서 방황하는 인생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에게는 많은 돈 보다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여자들이 남자의 돈만 보고 결혼을 하거나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남자와 결혼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관계를 우리는 성매매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상적인 연합이 아니라는 의미인데, 그것이 정상적이지 않은 것은 사람에게는 돈 보다도 자신의 존재 의미와 이유가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있어 구원과 가장 큰 사랑과 영생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아서 그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것이고, 또한 그것을 보고 육신을 가진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살도록 하신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고 사랑이고 영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을 보고 육신을 가진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그 삶을 살게 되고 그런 삶이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의 삶과 같이 다른 사람들이 그 삶을 보고 자신도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전도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십자가는 인간의 틀(mold)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원래의 모습을 가지고 예수님과 같은 삶을 따라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 십자가를 지는 삶은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그것을 지고 돌아다니고 또 실제로 못 박히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육신 가진 삶을 자신의 운명으로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요한사도와 많은 사도들이 영지주의를 그렇게 경계한 것이 바로 이것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 바로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왕이신 것이 바로 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운명이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 가진 삶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세상이 가진 법, 곧 연약한 육신은 늘 패배자가 되는 그 법,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한 법, 사람이 육신을 끊임없이 강하게 바꾸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법 앞에 사람은 머리에 있는 생각으로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을 가시관을 쓰심으로 보여 주셨고, 옷이 벗겨진 몸은 사람이 자신의 신분이 아무리 대단해져도 그 세상의 법 앞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으며, 손과 발에 못 박히심은 자신의 행동으로도 세상의 법 앞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기에, 예수님의 그 모습, 우리에게 보여주고 알려 주시고자 한 사람의 진짜 정체성을 보고 육신을 가진 삶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자신의 잔으로, 운명으로 받으신 것처럼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일 때 백부장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모습을 보고 늘 벗고자 한 육신의 연약함을 벗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운명의 잔이라는 것을 '아멘'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가치관, 인간의 육신은 단련되고 극복해서 고쳐내든 아니면 포기하고 영만 있으면 된다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언제나 조롱이 되는 것이고, 또 힘든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정말로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고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그 모습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백부장의 모습이고, 그것이 진정한 구원의 고백이며, 그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그렇게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육신을 가진 이 삶을 버릴 것이나 저주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님을 아는 삶이 그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육신이 연약하다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죄인 취급 받고 조롱당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모습인 것이다.



두려움을 이기는 온전한 사랑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괴롭지만 이렇게 살면 나중에 천국에 가서 영화를 누린다고 하니 참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쁨의 세계이다. 굳이 믿음의 세계가 아니라도 자신의 정체성에 만족하는 사람들의 삶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남이 보기에는 한심해 보이고 불편해 보여도 산에서 사는 사람들과 같이 자신이 만족하는 삶은 보기에는 어떠해도 그것은 억지로 하는 세계이다.


믿음이 없이도 그러한데 믿음을 가진 삶이야 더 말할 것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삶은 곤고한데 천국에 가야하니 억지로 참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라고 여기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단언코 말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삶이 천국 같지 않았던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다. 프로야구 선수로서 살고 훈련하지 않은 사람이 1군 무대에서 야구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육신의 삶을 인정하며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다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상의 피라미드 위로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본분이라고 여기는 세상에서 그것이 인생의 본질이 아니라고 여기며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아는 사람, 인생의 본질과 의미와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면서 겪게 될 일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이긴다고 하는 어떤 위협이나 협박과 탄압과 같은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런 모든 것도 다 세상과 다르게 사는 삶을 향한 세상의 한 모양이기 때문에 정말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과 나중에 천국에 가서 잘 살아야 하니 억지로 참고 사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하지만 온전한 사랑은 그것을 이길 수 있다고 하신다. 이것은 신앙의 과정에서 그 경륜이 있어야 하는 고백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에서 핍박에 대한 말씀을 하고서 5장에서 우리가 이 육신 안에서 탄식하는 것은 이것을 벗고자 함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


사람이 육신 안에 있으면서 겪는 삶의 곤고함, 흔히들 말하는 인생을 한자로 표현할 때 "고(苦)"라고 하는 이 삶은 참거나 탈피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인생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본질로 인한 증거라는 것을 알고 기뻐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의 기적이요 깨달음이고 그리스도의 삶이다.


만약 그것을 모른다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억지로 사는 삶,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해야만 하는 삶 그것보다 더한 지옥이 또 있겠는가? 만약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 아니라, 그 어떤 것을 사모 헤도 괴로운 인생일 뿐이다.


바로 그런 인생의 곤고함과 죽음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세상의 제도를 뒤집거나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인생의 자리를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시고, 우리가 그 사랑 안에서 서로에게 또 모르는 사람에게 그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신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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