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3장 13-24절) 사랑의 계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2. 9. 14:43 Writer : 김홍덕

흔히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이 시대의 현대인들도 그렇게 인정해 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인 것은 구제와 같은 일들이 많이 있고, 그것을 교회 안에서 많이 가르치고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한 사랑의 모습이지만 사랑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사랑의 표현양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성경에는 요한사도가 말씀한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라는 말씀과 같이 분명한 사랑의 모습이 구제이긴 하지만 왜 그렇게 하는 것인지가 본질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사회와 세상에서 경제적 여건은 동일할 수 없고, 또한 그런 이유에서만 아니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살아가는 육신의 문제에 대한 나눔이 절실한 것은 사실이고 이런 절실함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와 봉사단체들인 것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그런 모습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신앙이라는 측면만 강조하면서 육신의 문제는 돌아보지 않는 것은 영지주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영지주의가 신앙에 있어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이는 제작된 방송 콘텐츠가 있고 가정에 TV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 사랑의 본질이 있고 밥 퍼주는 봉사와 구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어느 것이라도 하나가 소홀하게 되면 안 되는 것이다.


계명이라는 것은 분명히 이론이 아니다. 실재적으로 어떤 형태로든지 지켜내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계명이라는 것은 사랑의 본질이 온전한 표현으로 표현되어 나타나는 것이 계명이 실천되는 것이다.


따라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성경에 사랑하고 하신 말씀을 좇아 사람에게 구제하고 봉사하는 것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을 계명과 같이 지켜서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전함에 있어 가장 혼돈스럽다고 할까 그런 것이 있다면 지킨다는 것과 같은 행동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명한 행동에 대한 규율은 행동만 그렇게 한다고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숨과 살아있는 생기만도 아니고, 또 육신만도 아니다. 생명은 사람이라는 유전자가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고 살아 움직일 때 생명이 있는 것이다.


계명도 이와 같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행동만 그렇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것이 그 사람의 행동과 삶으로 표현될 때 비로소 계명이 지켜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와 뜻인 계명의 목적과 본질이 분명히 그 사람 안에 있어야 하고 또한 그것이 삶으로 표현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힘든 것이 아니다. 생명은 자연스럽게 그 생명대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혼돈스러운 것은 사람의 육신의 호흡이나 혼을 사람의 본질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본질이 아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신앙의 핵심인 것이다. 육신의 호흡을 가지고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다 하여도 그 삶이 하나님의 의와 뜻을 나타내는 것에 사용되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다.


사랑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그 사람 안에 있어서 그것을 나타내고 또한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전하기 위하여 사는 삶, 그런 삶은 필요하면 구제하고, 또 그것을 위하여 필요하면 봉사하고 또 더욱 필요하다면 목숨도 내어놓는 그런 사랑이다. 그것이 사랑장의 말씀이기도 하다.


또한 이렇게 계명을 지켜가는 것에는 억지나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생수의 강이 넘치듯 생명의 본성이 확실하면 그 본성ㄷ대로 사는 것이다. 이 본성은 끊임없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목적과 의를 전하려 하는 본성이다.


이 본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나님도 그것을 전하기 위하여 아들을 보내시니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면 이 본성은 언제나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지신 의와 뜻을 전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렇게 의와 뜻이 살아가는 모습으로 있는 것이 계명이다. 그리고 그 계명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아시기 때문이다. 아니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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