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이라고 하면 가서 해치고 싶고 또 불행한 일이 그 사람에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을 연상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나"와 같은 표현은 좀 다른 것이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같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생업이 잘 풀리지 않거나 사업이 망했을 때 그것을 보면서 속으로 '뭔가 하나님께 회개할 일이 있어서 그렇구나'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세상이 미워하듯이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형제라고 하면 하나님의 생명을 한 아버지로부터 받아 나누고 있는 생명들의 관계를 말하는 것인데, 그 생명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구주로 시인한 믿음을 공유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것은 육신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정체성의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체성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 먹고사는 문제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체성이 회복된다는 것이 육신의 사업이나 생업의 어떠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단일 뿐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밥 먹듯이 행하시던 기적마저 다 놓으신 것이다. 


기적을 행하는 것이 인간의 정체성이 아니라, 세상의 법에 의하면 사람의 정체성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여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을 행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찬양하고 경배할 수는 있지만, 사람은 늘 그럴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에게 있어 무엇이 예수를 믿는 것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는데,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되고 죽어서 천국에 가서 부자로 사는 것과 같은 것이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 내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모습, 특히나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모습을 보면서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이 세상의 것이 본질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그 심령 안에 열린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같은 생명을 공유한 사람이 세상 살아가는 수단인 생업이나 하는 일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가 있다는 시각을 가질 이유가 없다. 단지 수단이 좀 잘 못되거나 익숙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육신으로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에 있어 아버지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방법과 수단과 도구로 일을 하다 잘 못되었다고 아들이라는 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관계도 이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형제가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해가는 삶의 모양이 때로 부족하고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실패하고 어리석어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과의 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며 그 사람에게 가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돌아보고 신앙을 바로 잡으라고 하면 욥의 세친구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과 같이 형제를 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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