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3장 1-12절) 믿음과 행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1. 26. 13:19 Writer : 김홍덕

신앙에 있어 말과 행동의 문제, 어떤 측면에서 이론과 실제라고 표현할 수 있는 문제를 흔히 <믿음과 행함>의 문제로 정의되고 한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 늘 핵심이 되는 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야고보서'일 것이다. 이 야고보서는 한 때 '성경으로 인정할 것이냐?'라는 논란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보면 믿음과 행함이라는 것은 참 끊임없는 논란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핵심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라는 바울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상충되어 보이는 두 말씀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다른 말씀이 아니라 동일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 Be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Do에 관한 것인지>를 묻는 것과, <소유냐? 존재냐?>와 같은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감출 수 없다."는 의미인데, 믿음과 행함, 생명과 표현, 내용과 형식 이 모든 것이 이와 같다. 즉 믿음이 있으면 행함이 따를 수밖에 없고, 생명은 어떻게든 표현되며, 내용과 형식은 절대 분리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 이러한 일원론적 가치관은 신앙의 절대적 기준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선악과라는 것이 인간 타락의 원인이고 결정체인데, 선악과라는 것이 어떤 것을 보는 기준이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가치관은 신앙이 타락하는 근본 원인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내용과 사람의 삶이라는 형식을 나누어서 의를 무시하고 형식을 선하게 여기면 율법주의가 되고, 의만 선하고 육신은 악하게 여기면 영지주의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일원론적 가치관의 말씀이다. 예를 들어 동전을 두고 앞면인지 뒷면인지를 논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동전이 어디에, 어떤 가치로 쓰이기 위한 것인지를 논하는 것이 바로 일원론적인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가진 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있고 살아있는 삶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있어 믿음과 행함은 낭중지추와 같이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믿음이 있으면 행함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자신이 감당할 수도 없고 이 육신의 삶이 자신이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할 수 없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공로나 수고를 하거나 절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로 성경 말씀을 지켜내려고 하면 그것은 믿음이 없고 행함만 있는 것이고 그것이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 육신 속한 삶에서 내용만이 중요하고, 이 세상은 전부 죄악이라서 어떻게든 그것과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하며, 세상에 충실한 것은 세상의 종살이라 여기는 신앙, 어쩌면 투철해 보이기도 하는 그 신앙은 인생이 육신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영지주의는 사도들이 그렇게 경계했던 삶이었고 올바르지 않은 신앙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만 있으면 육신으로서의 삶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난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하나님의 의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는 상태에서 노숙자에게 밥을 퍼 준다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의미 있는 삶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예수 믿기 때문에 사회적인 책임에 무관한 듯 하는 것도 바른 신앙은 아닌 것이다.


몇 년 전에 샘물교회 사람들이 선교한답시고 중동에 가서는 국가적인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 그 결과 몇 사람이 죽고 나라가 나서서 그들을 데리고 오는 어이없는 일이 있었다. 바로 그런 것이다. 육신의 삶을 부인한다는 것이 말이다.


샘물교회 사건 당시 필자가 다음 아고라에 올린 글


그런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왜냐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형식만 지키는 율법주의자들의 법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베드로가 종 말고의 귀를 잘랐을 때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 26:52~54)

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사람이 나서서 세상의 모순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심판하고 배척하고 대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법에 의하여 끌려가는 것,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니 세상에서 어떤 특권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세상을 무시하고 사는 것이 신앙이라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으로 사랑하자(요일 3:18)"고 하는 것은 밥을 퍼 주자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그리 하자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가지신 사람의 정체성과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내용을 아니 성품을 표현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랑에 있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것은 세상에 대한 대적이나, 세상에 대한 무시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시던 그런 모습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자신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면서 하나님께 중보하시는 그런 모습이다.


행함은 기본적으로 생명이 그 본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사람이면 두발로 서서 사회를 이루고 사는 것과 같다. 사람이라는 이름이 생명이고, 사람의 삶이 행함인 것이다. 이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행함은 사람에게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순종이 있지 항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순종은 육신을 가진 삶에 있어 육신이라는 한계에 순종하는 것이고,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세상의 일원으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아닌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본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을 발견하듯, 누가 그 삶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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