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요한 사도는 3장에 들어가면서 어떤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이러한 말씀은 뒤 이어 나오고 있는 3장의 내용들에서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신앙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당연히 그 심령의 깨달음에서 시작한다. 어떤 행동양식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으로도 생명이 나면 처음에는 존재 이외에 행위적인 것에 기대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갓 태어난 아이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 부모를 귀찮게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부모에게 있어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자녀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도 이와 같은 생명의 과정이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말씀하기 위하여 요한 사도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고 한 것이다.


아이가 자라서 존재 이상으로 어떤 행위로 그 부모에게 의미가 있어시듯, 신앙이라는 것도 그러하다. 이것은 분명한데, 왜 하나님께서는 행위와 공로와 소유의 신앙에 대하여는 인정하지 않으시는 존재의 하나님이신가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블로그에서도 끊임없이 신앙이라는 것이 행위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 왔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공로나 수고가 신앙이 아니라고……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신앙에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을 바꾸는 것인가 싶겠지만 그 이야기가 아니다.


군복을 입어서 군인이 아니라 군인이라서 군복을 입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군인이라는 정체성이 먼저 수반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가장 크다. 그리고 군인이면 군복을 입는 것이 당연하듯이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가 명확한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 성경의 말씀을 문자대로 또한 그 규정한 행동을 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 사람의 행동 양식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은 그 행위를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여기는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율법주의라는 것은 그 생명 곧,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생명 없이 율법에 규정된 규례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반대로 영지주의는 하나님의 생명만 있으면 되었지 그런 것을 지키면서 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은 오랫동안 문제가 되어 왔지만 해결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께 이르려고 한 생각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는 내용을 무시하고 형식에 속하는 율법을 행위로 지켜내는 것이 신앙이었기에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고, 또 성경의 긴 역사 동안 늘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벌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그런 행위를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명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무시하면서 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영화 <밀양>과 같은 것이 그런 기독교의 모습들이 사회적인 관점에서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지은 죄를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하나만으로 다 해결되었다고 고백하는 죄수의 모습은 형식을 무시하는 영지주의적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준다.(영화 <밀양> 중에서)> 


그런 문제가 초대교회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영지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한 사도도 말과 혀로만 말고 행함으로 사랑하자 했고,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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