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주의라는 것은 초대교회 시절에 생긴 사상이긴 하지만 현재의 시대라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영지주의가 사도요한이 경계하는 마귀의 생각이고 적그리스도라는 것은 분명하다.


적그리스도나 마귀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요소들이나, 알고 보면 우리 마음 안에 그런 요소들이 다 있다. 그래서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사람들과 다투시는 것이 있다면 사람에 대한 관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사람의 육신이 온전하다고 말씀하시는 반면에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에서 사람들이 취하고 있는 두 가지 큰 태도가 있는데 하나는 육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니 금욕하고 절제하고 훈련하여 하나님께 합당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고, 또 하나는 육신은 어차피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영혼이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한 두 구조에 있어 전자를 율법주의라고 할 수 있고, 후자를 우리는 영지주의라고 할 수 있다. 율법주이는 사람의 연약하고 추한 모습을 법으로 규정하여 다스리고 감추는 것이라면, 영지주의는 반대로 육신은 어쩔 수 없고 거룩하게 되는 것과는 무관하니 별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두 구조는 예수님을 보는 관점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율법주의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고, 영지주의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처럼 될 수는 없으니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양쪽의 생각은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생각이 아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에게 떠나온 자리라면, 영지주의는 가서는 안 될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육신을 분명히 기뻐하셨고, 그것을 다시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육신으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의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모습은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사람에 대한 생각은 기본적으로 온전하고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이다. 이에 대하여 사람이 자신과 또한 사람을 보면서 사람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은 신이 되고자 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하여 자신이 정의를 내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어떠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를 자신의 생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평범한 말로 하면 '적어도 사람이 이래야지!'하는 것이 된다.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스스로가 어떤 것이 선한 것이며, 어떤 것이 악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권세를 가지려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적어도 사람은 이래야지!'라는 기준들이 생긴 것이다.


그 기준이 율법을 낳은 것이다.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인 것이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려 하면 사람의 한계와 정체가 드러나도록 되어 있는 것인데 이를 오해한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많이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기준을 선악과를 먹은 결과 가지게 되니 나타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육신의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것이 영지주의다. 이 시대에 영지주의의 변형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무시하는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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